이란 반정부 시위 확산…테헤란 등 주요 도시서 대규모 집회
이란의 수도 테헤란과 다른 도시들에서 대규모 시위대가 행진에 나섰다. 수년 만에 이란의 성직자 지배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의 최대 규모 시위로 전해진다.
지난 8일(현지시간) 저녁 테헤란과 제2의 도시 마슈하드에서 열린 평화로운 시위는 보안당국에 의해 해산되지 않았는데, BBC 페르시아어 서비스가 검증한 영상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한 감시 단체는 이란에서 전국적인 인터넷 차단이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영상에서는 시위대가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축출을 외치는 모습이 담겼다.
또 지지자들에게 거리로 나설 것을 촉구해 온 망명 중인 마지막 국왕의 아들 레자 팔레비의 귀환을 요구하는 구호도 들렸다.
인권 단체들에 따르면 이번 시위는 이란 통화 가치 붕괴에 대한 분노에서 촉발돼 12일째 이어지고 있으며, 이란 전체 31개 주의 100곳이 넘는 도시와 마을로 확산됐다.
미국에 본부를 둔 '인권활동가 뉴스통신(HRANA)'은 어린이 5명을 포함해 시위대 최소 34명과 보안 인력 8명이 사망했으며, 시위대 2270명이 체포됐다고 밝혔다.
노르웨이에 본부를 둔 감시단체 '이란 인권(IHR)'은 보안군에 의해 어린이 8명을 포함해 시위대 최소 45명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BBC 페르시아어 서비스는 22명의 사망자에 대해 사망 사실과 신원을 확인했으며, 이란 당국은 보안 인력 6명이 숨졌다고 보고했다.
8일 저녁, 소셜미디어에 게시돼 BBC 페르시아어 서비스가 검증한 영상에는 북동부 도시 마슈하드의 주요 도로를 따라 대규모 시위대가 이동하는 모습이 담겼다.
현장에서는 "국왕 만세", "이것은 최후의 전투다. 팔라비는 돌아올 것이다"라는 구호가 들린다. 또 한 장면에서는 여러 남성이 고가도로 위로 올라가 부착돼 있던 감시 카메라로 보이는 장비를 제거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온라인에 올라온 또 다른 영상에는 동부 테헤란의 주요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대규모 시위대가 담겼다.
수도 북부에서 BBC 페르시아어 서비스에 전달된 영상에서는 또 다른 대규모 인파가 "이것은 최후의 전투다. 팔라비는 돌아올 것이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같은 북부 지역의 다른 곳에서는 보안군과의 충돌 이후 시위대가 "치욕적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모두 함께다"라고 외치는 장면도 촬영됐다.
다른 영상들에서는 중부 도시 이스파한에서 "독재자에게 죽음을(하메네이를 지칭)", 북부 도시 바볼에서 "국왕 만세", 북서부 도시 타브리즈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모두 함께다"라고 외치는 구호를 들을 수 있다.
BBC 페르시아어 서비스에 전달된 영상 중 서부 도시 데즈풀에서 대규모 시위대와 함께 보안 인력이 중앙 광장에서 발포하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도 담겼다.
이날 저녁 시위는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축출된 국왕의 아들이자 워싱턴DC에 거주하고 있는 레자 팔라비가 앞서 이란 국민들에게 "거리로 나와 단결된 전선으로 여러분의 요구를 외쳐라"라고 촉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졌다.
팔라비는 소셜미디어 X에 올린 글에서 "오늘 밤 수백만 명의 이란인들이 자유를 요구했다"고 말하며 시위대를 "용감한 동포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정권에 책임을 묻고 있다"며 감사를 표했고, 유럽 지도자들에게도 같은 행동을 촉구했다.
또 9일 밤(현지시간) 20시부터 시위를 계속할 것을 호소했다.
이란 국영 언론은 8일 일어난 시위의 규모를 축소해 보도했다. 일부 보도에서는 시위가 전혀 없었다고 부인하며 텅 빈 거리 영상을 게시하기도 했다.
한편 인터넷 감시단체 '넷블록스'는 지표상 이란이 "전국적인 인터넷 차단 한가운데에 있다"고 밝혔다.
이 단체는 "이번 사태는 전국 곳곳의 시위를 겨냥한 디지털 검열 조치가 단계적으로 강화돼 왔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시민들의 소통할 권리를 저해한다"고 경고하며 여러 도시에서 인터넷 연결이 끊겼던 사례를 언급했다.
이날 오전 서부 일람 주의 작은 마을 로마르에서 촬영된 영상에는 군중이 "대포, 탱크, 불꽃놀이, 무라(mullahs)들은 물러가라"고 외치는 모습이 담겼다. 이는 성직자 지배층을 겨냥한 구호다. 또 다른 영상에서는 침입당한 것으로 보이는 은행 밖에서 사람들이 종이를 하늘로 던지는 장면이 포착됐다.
이밖에 일람주를 비롯해 케르만샤주와 로레스탄주 등 쿠르드족 인구 비중이 높은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상점들이 대거 문을 닫은 모습도 영상으로 확인됐다.
이는 해당 지역에서 발생한 시위에 대한 치명적인 탄압에 대응해 망명 중인 쿠르드 반정부 단체들이 총파업을 촉구한 이후 벌어진 것이다.
쿠르드계 인권단체 '헹가우(Hengaw)'에 따르면 이번 사태로 일람주와 케르만샤주, 로레스탄주에서 보안군에 의해 시위대 최소 17명이 숨졌으며, 이들 가운데 다수는 쿠르드족이나 로르족 소수민족 구성원이었다.
지난 7일에는 서부 이란의 여러 도시와 마을을 비롯해 다른 지역에서도 시위대와 보안군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이란 인권(IHR)'은 이날이 이번 시위 국면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온 날이었다며, 전국에서 시위대 13명의 사망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마흐무드 아미리-모가담 IHR 사무총장은 "증거에 따르면 탄압의 규모가 날이 갈수록 더 폭력적이고 광범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헹가우는 7일 밤 북부 길란 주 코슈케 비자르에서 시위자 2명이 보안군에 의해 총격으로 사망했다고 전했다.
혁명수비대와 가까운 이란 준공영 통신사 파르스는 7일 경찰관 3명도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파르스는 남서부 로르데간 마을에서 "폭도" 집단 내 무장 개인들에 의해 두 명이 총격으로 숨졌으며, 세 번째 경찰관은 테헤란 서부 말라드 지역에서 "불안 사태 통제 노력 중" 칼에 찔려 숨졌다고 전했다.
지난 8일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당국이 시위대를 살해할 경우 군사적으로 개입하겠다는 경고를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라디오 '휴 휴잇 쇼'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들이 폭동 중 자주 그러듯이 사람들을 살해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매우 강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은 이란 경제가 "궁지에 몰려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8일 미네소타 경제클럽에서 연설하며 "트럼프 대통령은 시위대가 더 이상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지금은 매우 긴박한 순간"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은 평화적 시위를 다루는 과정에서 보안군이 '최대한의 자제'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성명을 통해 "어떠한 폭력적이거나 강압적인 행동도 피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란에서 최종 권력을 쥔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지난 3일(현지시간), 당국이 "시위대와 대화해야 한다"면서도 "폭도들은 제압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시위는 지난달 28일, 이란 통화 리알화 가치가 공개 시장에서 미 달러 대비 다시 급락하자 테헤란의 상인들이 거리로 나서 분노를 표출하면서 시작됐다.
리알화는 지난 1년 동안 사상 최저치로 떨어졌고, 인플레이션은 40%까지 치솟았다. 이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둘러싼 제재가 경제를 압박하는 가운데, 정부의 부실한 운영과 부패가 겹친 결과다.
이후 대학생들이 시위에 합류했고, 시위는 다른 도시들로 확산됐다. 현장에서는 성직자 지배 체제를 비판하는 구호가 자주 울려 퍼졌다.
영국에 거주하는 한 활동가를 통해 BBC에 전달된 메시지에서 테헤란에 사는 한 여성은 절망감이 시위를 부추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불안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서 "이곳에서 목표를 추구할 희망도, 이주할 날개도 없이 공중에 매달린 기분이다. 이곳 삶은 견딜 수 없게 됐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여성은 성직자 체제가 자신의 꿈을 "빼앗았다"며, "우리에겐 아직 외칠 목소리와 그들의 얼굴에 날릴 주먹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고 전했다.
서부 도시 일람에 사는 한 여성은 체제와 연관된 가정 출신의 젊은이들 역시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보기관에서 잘 알려진 인물인 아버지를 둔 친구와 그의 세 자매가 아버지 모르게 시위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시위는 2022년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에 체포됐다가 숨진 쿠르드계 여성 마흐사 아미니 사건 이후 가장 광범위하게 퍼졌다. 인권 단체들에 따르면 당시 수개월 동안 보안군에 의해 550명 이상이 숨지고 2만 명이 구금됐다.
이슬람 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는 2009년, 논란이 된 대통령 선거 이후 주요 도시에서 수백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때였다. 당시 진압 과정에서 수십 명의 야권 지지자가 숨지고 수천 명이 구금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