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가 패배한 이유...결함이 있는 후보 탓? 실패한 선거 운동 때문?
지금으로부터 거의 한 달 전,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 후보는 미국 방송국 ABC ‘더 뷰’에 출연했다. 해리스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는 국민들에게 자기를 소개하는 화기애애한 자리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신은 조 바이든 현직 대통령과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에 “지금 당장 머리에 생각나는 게 없다”는 해리스의 답변으로 인해 인터뷰 분위기는 빠르게 식어버리고 만다.
이후 공화당 측의 공격 포인트가 된 이 같은 답변은 중도 사퇴한 바이든 대통령에 이어 급히 시작된 해리스의 선거 운동이 지난 5일(현지시간) 치러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에 맞서 결정적으로 패하게 된 정치적 역풍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선거 다음 날인 6일 늦은 오후, 해리스 후보는 공개적으로 선거 패배를 인정하며 지지자들에게 “절망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에서 서로를 향한 손가락질이 시작되고, 당의 미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선거 운동이 어디서 잘못됐으며, 어떤 부분에서 더 잘할 수 있었는지 등의 자아 성찰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6일 이른 아침까지도 해리스 선거 캠프 측 인사들은 침묵을 지켰으며, 일부 보좌관들은 박빙의 승부가 되리라는 예상과는 달랐던 결과에 충격을 받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다 젠 오말리 딜런 대선 캠프 선대본부장은 직원들에게 “패배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힘든 일”이라며 “이를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이메일을 보냈다.
현직 부통령이기도 한 해리스는 인기 없는 현직 대통령과 거리를 두는 데 실패했으며, 유권자들을 향해 현재 이들이 광범위하게 느끼고 있는 경제 불안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지 설득해내지도 못했다.
바이든의 짐
바이든 대통령이 재앙과도 같았던 모습으로 토론을 망친 뒤 대선 출마를 포기하면서 해리스는 철저한 예비 선거와 같은 과정을 거치거나 표 한 표도 얻지 않고 바로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해리스는 100여 일을 앞두고 선거 캠프를 출범하며 “새로운 세대의 리더십”을 약속했다. 그러면서 임신중지권을 중심으로 여성 유권자들을 결집하고, 물가 상승과 주택 가격 상승과 같은 경제 문제에 집중해 노동계급 유권자의 마음을 다시 돌려놓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선거일까지 불과 3개월을 앞둔 해리스의 초반 기세는 나쁘지 않았다. SNS에서는 관련 밈이 넘쳐나고, 테일러 스위프트 등 여러 스타가 지지 의사를 표시했으며, 기록적인 규모의 기부금이 쇄도했다.
그러나 해리스는 대부분 유권자들이 지닌 반 바이든 정서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실제로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은 집권 4년 내내 꾸준히 40%대 초반에 머물렀으며, 현재 미국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답한 유권자들은 약 3분의 2에 달했다.
이에 일각에서는 바이든의 대체자로 등장한 해리스가 너무 바이든에게 계속 충성했던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리스의 전 커뮤니케이션 담당자였던 자말 시몬스는 이는 “함정”이라고 부르며 반박했다. 해리스가 바이든과 어떻게든 거리를 두려 했다면 이는 공화당 측에 불충하다는 또 다른 공격 포인트만 제공하는 셈이었다는 것이다.
“자신을 선택해 준 대통령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해리스는 자신의 상사이기도 한 바이든에게 해리스는 상사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으면서도 현 행정부의 성과에 대해 언급하며 균형을 자고자 노력했다. 이에 바이든의 정책과 완전히 거리를 두기는 꺼리면서도 바이든의 정책을 선거 유세에서 대놓고 홍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해리스는 유권자들에게 왜 자신이 이 나라를 이끌어야 하는지 설득하는 데 실패했으며, 이민자 등에 대한 광범위한 우려 및 경제적 좌절감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설득력 있는 주장을 전달하지도 못했다.
시카고 대학교의 여론 연구 기관인 ‘NORC’가 미국 유권자 12만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AP 보트캐스트’ 데이터에 따르면 유권자 10명 중 약 3명은 자신과 가족의 경제적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고 답했는데, 이는 10명 중 2명 정도였던 4년 전에 비해 늘어난 수치다.
아울러 유권자 10명 중 9명은 식료품 가격에 대해 매우 혹은 어느 정도 우려한다고 답했다.
또 미국에 있는 불법 이민자들을 본국으로 추방해야 한다고 답한 이들도 10분의 4에 달했는데, 2020년에는 10명 중 3명 정도였다.
그리고 선거 운동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해리스도 자신의 행정부는 바이든 행정부의 연장선이 아니라고 강조하려고 했으나, 그렇다면 자신만의 정책은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고, 유권자들이 전반적으로 실패라고 생각하는 지점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종종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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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바이든을 지지했던 핵심 유권자층 재결집을 위한 노력
해리스 측은 민주당의 핵심 선거구를 되찾아와 2020년 바이든의 승리를 이끌었던 유권자층을 다시 결집할 수 있길 꿈꿨다. 흑인, 라틴계, 청년뿐만 아니라 고학력의 교외 유권자 중에서도 더 많은 표를 끌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해리스는 이러한 핵심 유권자층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낸 것으로 나타났다.
출구 조사에 따르면 해리스는 라틴계, 흑인, 30세 미만 청년 유권자들에서 각각 13%p, 2%p, 6%p를 더 잃었다. 물론 정확한 개표 결과가 나오면서 숫자는 약간 바뀔 수 있으나, 현재 흐름이 어떠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2016년 민주당 대선 예비선거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에게, 2020년 예비선거에서는 바이든에게 패한 버니 샌더스 버몬트주 상원의원(무소속)은 노동계급 유권자들이 민주당을 버린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처음에는 백인 노동자 계급이었고, 이제는 라틴계와 흑인 노동자들도 등을 돌렸다”는 샌더스 의원은 “민주당 지도부가 현 상황과 체제를 옹호하는 동안, 국민들은 분노했으며 변화를 요구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국민들이 옳습니다.”
여성 유권자들은 대체로 트럼프보다는 해리스를 지지했으나, 해리스 진영에서 기대했던 만큼의 득표율이 나오진 못했다. 또한 교외 지역에 살며 원래 공화당을 지지하는 여성 유권자를 끌어오겠다는 야심도 실패로 끝이 났으며, 백인 여성의 경우 전체의 53%가 트럼프를 선택했다.
연방대법원이 임신 중지에 대한 헌법적 권리를 인정한 판례를 뒤집은 이후 처음 치러진 대선이기에 민주당은 재생산 권리를 위한 투쟁에 초점을 맞춘 해리스가 결정적으로 승리할 수 있으리라 계산했다.
출구조사 데이터에 따르면 이번에 여성 유권자의 약 54%가 해리스에게 표를 던졌으나, 2020년 바이든은 이보다 높은, 57%의 여성들로부터 지지를 받은 바 있다.
‘반트럼프’ 전략의 역효과
한편 해리스는 정식으로 후보가 되기 이전부터 이번 대선을 바이든 현 대통령이 아닌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 심판으로 프레임을 짜고자 했다.
전직 캘리포니아 검사 출신인 해리스는 자신의 경력을 바탕으로 트럼프를 기소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선거 운동 초기, 해리스는 트럼프가 민주주의에 실존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바이든 캠프의 핵심 주장을 버리고 대신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중산층을 보존하자는 미래 지향적이며 “즐거운” 메시지를 우선시하기로 선택했다.
그러나 막판에 가서는 해리스도 트럼프의 막말 수사에 지쳐 불만을 품은 공화당원들과 함께 트럼프를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등 트럼프의 재집권이 불러올 위험성을 크게 강조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트럼프 재임 시절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낸 존 켈리가 트럼프가 아돌프 히틀러에 동조하는 발언을 했다고 말한 이후, 해리스는 트럼프는 실제로 “불안정하고 혼란한 인물”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베테랑 공화당 여론조사원인 프랭크 런츠는 지난 5일 “해리스는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 때리기’에만 너무 집중하면서 패배했다”고 평가했다.
“유권자들은 이미 트럼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해리스의 계획은 무엇인지, 당선되고 1시간 이내, 1일 이내, 1달 안에, 1년 이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고자 했습니다.”
런츠는 “해리스 본인의 계획과 아이디어보다 트럼프에 더 많은 관심을 집중시킨 선거 전략은 엄청난 실패”라고 지적했다.
결국 해리스가 트럼프를 이기고자 추구하려 했던 연합과 결집은 실현되지 않았으며, 유권자들의 민주당에 대한 거부감은 민주당이 그저 인기 없는 대통령을 넘어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