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압록강대교 건넌 김정은…느슨해진 제재 딛고 트럼프 바라보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24일 단둥 방문은 반나절 남짓에 그쳤다.
개통 9일만에 신압록강대교를 건넌 김 위원장은 항미원조기념탑에 헌화하고 자동차 공장을 둘러본 뒤 곧장 평양으로 돌아갔다.
겉으로 드러난 메시지는 북중 혈맹 과시와 경제협력이다. 그러나 짧은 일정 이면에는 더 많은 계산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실상 힘을 잃은 대북제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재회 구상, 그리고 최근 불거진 사망설에 대한 응답이다.
'무너진 제재, 열린 다리'
이번 북중 만남에서 양측이 공통으로 강조한 것은 경제협력이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김정은 위원장은 "중국과 함께 역사적 우의를 계승하고 실무 협력을 확대해 양국 인민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가져다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왕후닝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은 "신압록강대교의 개통을 계기로 인적 왕래와 경제·무역 협력을 확대하고 양국 인민에게 더 나은 혜택을 가져다주기를 원한다"고 화답했다.
북한 역시 다리 개통에 공을 들였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16일 "조중(북중) 두 나라 정부와 인민들의 기대와 관심 속에 '조중압록강다리' 개통식이 15일 현지에서 진행됐다"고 보도했다. 김 위원장이 개통 9일 만에 직접 이 다리를 건넌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이번 북중 만남은 대북제재 문제와 떼어 놓고 보기 어렵다. 완공 12년 만에 문을 연 다리 위에서 북중 두 나라가 '경제·무역 협력'을 한목소리로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김진무 전 숙명여대 교수는 BBC에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사실상 무력화된 상태"라고 진단했다. 2024년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패널의 임기가 끝나면서, 제재 조항은 남아 있지만 실질적으로 이를 감시하고 실행할 유엔 차원의 기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는 "러시아와 중국을 통해 물자가 계속 들어가고 있고,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미국 역시 북한과 거래하는 제3국 기업을 일일이 찾아내 제재할 여력이 없다"면서 "신압록강대교 개통도 이런 흐름 위에 놓여 있다"고 평가했다.
중국의 계산도 달라지고 있다고 봤다. 미국의 압박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중국이 "언제까지 미국 말을 들어야 하느냐"는 입장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인데, 그는 "이번에 압록강 대교를 개통한 것도 중국이 공개적으로 (북한을) 지원하겠다는 메시지"라고 해석했다.
중국은 공식적으로는 대북제재를 준수한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12년간 묶여 있던 다리가 열리고, 그 다리로 북한 최고지도자가 직접 건너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북중 경제협력이 새 국면에 들어섰다는 신호로 읽히는 분위기다.
앞서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지난 6월 시진핑 주석의 방북을 앞두고 BBC에 "중국이 러시아와 함께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고쳐 쓰려는 '반미 연대'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며 "그 퍼즐에서 빠진 한 조각이 북한"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북중 모두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는 "김정은 입장에서는 안보적·군사적 협력은 러시아로부터 받는다고 하더라도, 경제적인 협력은 중국으로부터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시선은 결국 워싱턴으로?
김진무 전 교수는 김 위원장의 최종 목표가 트럼프 대통령과의 재회에 있다고 바라봤다. 제재가 이미 느슨해진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한 번 더 만나면 제재를 완전히 허물 수 있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비무장지대(DMZ) 요새화와 지뢰 매설로 한반도 긴장을 끌어올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짚었는데, 특히 "남한을 보고 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한 의도"라면서 "진보 정부가 들어선 남한을 코너로 모는 것은 북한에도 득이 될 것이 없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도 변수로 꼽았다. "트럼프는 기회가 와서 자기가 뜰 수 있다고 보면 언제든 달려드는 사람"이라며 "성과가 나고 안 나고는 두 번째 문제"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노벨평화상을 거론하며 한반도 전쟁을 막았다고 언급한 것도 흘려들을 대목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여러 차례 연내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한중 정상회담 등을 계기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중국의 역할을 강조해 왔다. 중국 선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를 앞두고 중국이 북미 대화의 중재자로 나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다만 이번 방중에서 북미 회담 문제가 깊이 논의됐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김 위원장이 만난 상대는 시진핑 국가주석이 아닌 권력 서열 4위인 왕 주석이었고 일정도 반나절에 그쳤다.
왕 주석이 시진핑 지도부의 정책 구상을 맡아 온 핵심 이론가라는 점에서 시 주석의 의중이 간접적으로 오갔을 가능성은 남아 있다. 하지만 북미 대화를 본격 논의할 카운터파트로 보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워싱턴을 향한 메시지는 이번 방중보다 이후 행보에서 더 분명해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건재 과시, 그러나 빈 곳간?
이번 방중에는 김 위원장의 건재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겼다는 분석도 이어진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중국 반체제 인사 셰완쥔은 지난 19일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김 위원장이 뇌출혈로 사망했다는 주장을 올렸고, 이 소문은 삽시간에 국내외 매체를 통해 확대 재생산됐다.
북한은 이튿날 곧바로 반박에 나섰다. 관영 매체를 통해 김 위원장이 19일 부인 리설주 여사, 딸 주애와 함께 평양의 '전국피복, 신발전시회-2026'을 참관했다며 사진을 공개한 것이다.
방중 당일인 24일에도 김 위원장이 22~23일 조선인민군 제3차 중대장대회를 주재했다고 보도했다. 여기에 직접 국경을 넘어 중국 고위 인사와 마주 서면서 사망설에 쐐기를 박은 모양새다.
김진무 전 교수는 앞서 김여정 노동당 총무부장의 행보를 두고도 사망설에 선을 그었다. 그는 "진짜 김정은이 유고라면 김여정이 어떻게 움직이겠느냐"며 "김여정이 움직였다는 것은 김정은이 건재하다는 방증"이라고 했다.
건재를 과시했다고 해서 북한의 사정이 넉넉한 것은 아니다. 김 전 교수는 북한의 대외 행보를 읽을 때 빼놓지 말아야 할 전제로 경제난을 꼽았다. "모든 것은 북한 경제가 굉장히 안 좋다는 것을 전제로 두고 시작해야 한다"는 분석인데 김정은이 생각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러시아 역시 "북한을 도울 형편도 못 된다"고 했다.실제 러시아는 지난 2014년 크림반도 강제 병합 이후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으며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제재가 대폭 강화됐다.
돈이 필요한 이유는 체제 유지와도 맞닿아 있다. 김 전 교수는 특권층(지배 연합)을 단단히 유지하려면 측근들에게 계속 혜택을 나눠줘야 하고,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독재 정권뿐만 아니라 민주 정부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결국 신압록강대교는 북한에 단순한 교통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비어 가는 곳간을 채울 통로이자, 무너진 제재의 틈을 넓히는 통로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닿기 위한 우회로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이 반나절 동안 건넌 다리 위에 북한의 당면 과제가 모두 실려 있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