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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나답게 사는 세상 꿈꿔요'...일본 퀴어 축제에 선 재일교포 학생들

2024.05.30
관객에게 버나돌리기를 가르쳐주고 있는 오사카 건국학교 학생
@otackgu
4월 20일 X(구 트위터)엔 교토 퀴어 축제에서 펼쳐진 한국 전통 연희 공연 영상이 올라와 화제가 됐다

“재일교포와 퀴어 모두 소수자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일본 퀴어 축제에서 재일교포 학생들의 공연을 보니 울컥해졌습니다."

지난 4월 20일 소셜미디어 X의 한 이용자는 일본 교토의 퀴어 축제에서 펼쳐진 한국 전통연희 공연 영상을 자신의 계정에 올렸다. 이 영상은 30만회 넘게 조회되며 화제가 됐다.

그는 “여기서 이런 공연을 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며 "바로 이를 영상에 담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관객들에게 자신들을 소개하고 있는 재일교포 학생들
@otackgu
공연에 참가한 학생들은 한국어와 일본어로 번갈아 자신들을 소개하며 능숙하게 공연을 이어갔다

한국어와 일본어로 능숙하게 자신들을 소개하고 호응을 유도한 영상의 주인공은 일본 오사카의 재일교포 학교인 건국학교의 학생들. 이들은 한국 전통 춤과 노래를 배우는 전통예술부 ‘한소리'의 부원이다.

이들이 어떻게 교토 퀴어 축제 무대에서 한국 전통 연희를 선보이게 됐는지, 동아리 소속 고세라(16), 이효주(16)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전통 의상을 입고 포즈를 취한 이효주, 고세라 학생
오사카 건국학교
오사카 건국고등학교의 이효주, 고세라 학생이 교토 퀴어 축제에 서게 된 과정을 BBC에 전했다

LGBTQ+를 주제로 한 춤으로 최우수상 수상

“작년에 LGBTQ+라는 이름의 공연으로 최우수상을 받아 퀴어 축제에도 초대받았어요."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인 이효주 양이 이번 퀴어 축제 출연 이유에 대해 말했다.

한소리 중등부 학생들은 지난해 9월 오사카 추계 종합체육대회 중등부 창작댄스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 동아리는 한국 전통 연희를 주로 하지만 이 대회엔 매년 현대 창작 무용을 만들어 참가해왔다.

“류첼 씨라는 트랜스젠더 분이 계세요. 일본의 LGBTQ+를 대표하는 존재인데, 그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이 양은 대회를 두 달여 앞두고 전해진 류첼의 소식이 이번 작품 주제를 정하는 결정적 계기였다고 밝혔다.

류첼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자신을 정체화한 일본의 유명 모델 겸 인플루언서다. 2016년 결혼해 아들을 둔 그는 지난 2022년 “더 이상 남자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며 커밍아웃했다.

이후로도 한동안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SNS에서 “아버지 없이 아들을 키우게 했다”는 등의 비난에 시달리다 지난해 7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마이크를 들고 발언하고 있는 일본 유명 연예인 류첼
Getty Images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한 일본의 유명 연예인 류첼은 지난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 양은 류첼의 사연을 통해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비판받고 고통받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춤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에 LGBT+라는 주제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게 됐다”고 밝혔다.

그렇게 만들어진 ‘LGBTQ+ : 자신답게 사는 것은 죄인가?’라는 이름의 작품에서 이들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의 모습을 약 6분간 갖가지 동작으로 표현했다.

함께 공부하고 역할극까지 하며 알게 된 사회의 시선

“저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처음엔 LGBTQ+와 관련된 얘기를 들으면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이 양은 그러나 대회를 준비하며 “성 정체성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중학생 부원 모두가 도서관에 가서 개성, 차별, 성별 관련된 책들을 읽었어요. 류첼 씨에 관한 책을 함께 읽기도 했어요."

이 양은 이런 준비 과정이 많은 공부가 됐다고 한다.

학교에선 학생들의 소식을 들은 한 교사가 교토 퀴어퍼레이드의 기획자를 초청해 성, 젠더 정체성과 관련된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교토 퀴어 퍼레이드 출연도 이 강연이 계기가 됐다.

학생들은 역할극을 하기도 했다. 정체성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 그를 공격하는 사람 등 역할을 나눠 각자의 입장이 되어봤다.

“무서웠어요." 고세라 양은 공격받는 성소수자 역할을 맡았고, 공연에서도 이 역할을 맡아 춤을 췄다. 고 양은 춤을 출 때 “류첼 씨의 기분이 어땠을지를 계속 생각했다"고 말했다.

고 양은 “류첼 씨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SNS에서 멋진 모습만 봤는데, 이번 공연 준비 과정에서 그에게 쏟아진 비방, 중상 내용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냥 살아가려고 했을 뿐인데도,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 시선이 무서웠어요."

재일교포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아

한소리 학생들은 과거에도 인권, 사회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로 시 대회에 출전해왔다. 이들이 춤으로 표현했던 주제는 ‘세월호', ‘왕따', ‘헤이트 스피치(인종차별적 발언)’, ‘소녀상 문제' 등 다양하다.

“저희는 재일교포이다 보니까 어쩌면 같은 소수자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걸 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이니까…"

한소리 학생들을 지도해오고 있는 교사 차천대미 씨는 이런 주제 선정이 재일교포라는 학생들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재일교포 2세인 차 씨는 오랜 기간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감추고 살았다. 일본인 학교에 다닌 차 씨는 “일본 학교에선 한국에 대해 안 좋은 인상을 주는 교육만 받았다"며,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건 위험한 것”이고, “한국식 이름을 감춰야 되는 줄 알았다"고 밝혔다.

“고등학교 때 한국인 선배들이 하는 전통 공연을 보면서 한국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구나 생각했어요." 차 씨는 이때부터 전통 연희를 통해 한국은 물론 차별받는 존재들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왕따 문제를 표현한 한소리의 작품 '들어가지 못하게 된 교실'
오사카 건국학교
왕따 문제를 표현한 한소리의 작품 '들어가지 못하게 된 교실'

차 씨는 “일본 학교에서 차별을 많이 경험한 어머니 세대가 자식들을 민족학교에 많이 보냈기 때문에, 여기 아이들은 차별받는다는 사실을 잘 못 느낀다"면서도, “그럼에도 여전히 차별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기에 이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는 전통 예술부이지만 현대 창작 댄스 대회에 나가는 이유도 이와 같다며 “마음에 와닿는 주제를 잘 표현하려 한다"고 밝혔다.

"기술적으로는 조금 부족할지 모르지만, 표현력에 대해선 점수를 많이 받아서 10년 넘게 최우수상을 받고 있어요."

'모두가 나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탈춤을 추고 있는 한소리 학생들
오사카 건국학교
한소리 학생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이렇게 활동하고 있는 자신들의 존재를 더 알리고 싶다'고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한소리는 4월 교토 퀴퍼에선 대회에 출전했던 현대 무용 대신 장기인 전통 연희를 선보였다. '무부'라는 이름의 창작무용에서 이들은 버나돌리기, 사자춤, 풍물놀이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수준급으로 선보였다.

영상을 촬영해 게시한 X 이용자는 "무대가 정말 완성도 있고 멋졌다"며, "많은 관객이 공연에 몰입했다고" 말했다.

이 양은 본인들의 "메시지를 전하고 힘이 되려" 출전한 퀴어 축제에서 "오히려 감동을 받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남성분들이 되게 예쁜 치마를 입거나, 여성들 멋있는 옷을 입거나, 그렇게 자기 자신을 지키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저희가 감동받았어요"

고 양은 “생각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참가해 놀랐다"며 “성소수자 당사자나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이렇게 많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고 양은 이어 "일본에서 태어나서 이렇게 활동하고 있는 저희 존재를 더 많은 분들께 알리고 싶다"며, "용기를 가지면서 다 같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다"고 전했다.

이 양도 "한국 전통 예술의 멋짐을 알리고 싶다"며, 동시에 이를 통해 "숨기고 살아야 하는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고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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