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EU, FTA 체결...'모든 무역 협정의 어머니'
유럽연합(EU)과 인도 모두 미국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관계 강화에 나선 가운데, 양측이 거의 20년간 이어진 간헐적 협상 끝에 27일(현지시간) 기념비적인 무역 협정을 발표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델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해냈다. 모든 협정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 또한 "역사적인" 협정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협정을 통해 EU 27개 회원국과 세계 1위 인구를 자랑하는 인도 간 자유 무역이 가능해진다. 양측의 경제 규모를 합하면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약 25%를 차지하며, 인구는 20억 명에 달한다.
이번 협정에는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대규모 관세 인하와 더불어 공공 안보 협력 체계 관련 내용도 포함됐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과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양자 정상회담이 열리는 델리에서 모디 총리를 만났다.
유럽집행위원회는 화학제품, 기계류, 전기장비, 항공기 및 우주선 등 대부분의 수출품에 대한 관세가 단계적인 감축 과정을 거쳐 완전히 폐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현재 최대 110%에 달하는 자동차 관세로, 앞으로는 연간 25만 대 한도에서 10%로 인하된다. 이는 인도가 지난해 7월 영국과의 협정에서 허용한 3만7000대의 한도보다 6배 큰 규모다.
아울러 인도는 EU산 와인, 맥주, 올리브유에 대한 관세도 인하할 예정이다.
유럽 측은 이번 협정을 통해 투자 흐름이 활성화되고, 유럽 시장 접근성이 개선되며, 양측 간 공급망 연계가 한층 더 강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도 측은 섬유, 가죽, 수산물, 수공예품, 보석류에 대한 관세가 인하되거나 철폐될 것이라며, 자국 수출품 대부분이 EU 시장에서 "우대적 접근"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차, 커피, 향신료, 가공식품 등도 이번 협정의 혜택을 볼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인도 측은 "유제품, 곡물, 가금류, 콩 식품, 특정 과일 및 채소 등 민감한 분야는 신중하게 보호해 국내 우선순위와 수출 성장 간 균형을 도모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양측은 전문가들의 EU와 인도 간 단기 이동을 더욱 원활하게 보장하는 프레임워크에도 합의했다.
모디 총리는 "이는 인도 최대의 자유무역협정(FTA)"이라며 "인도 농민과 중소기업의 유럽 시장 접근성이 개선될 것이다. 제조업 및 서비스 분야도 활성화될 것이며, 혁신적인 파트너십도 촉진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무역협정은 인도와 EU 양측 모두 미국의 경제적, 지정학적 압박에 직면한 가운데 성사됐다.
인도의 경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부과한 50%의 관세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미국과의 무역 협정 체결은 계속 지연되고 있다.
유럽의 경우, 지난주 트럼프 대통령은 자국의 그린란드 합병에 반대하는 유럽 동맹국들을 향해 무역 전쟁의 수위를 높이겠다고 위협했다가 이후 한발 물러선 상황이다.
이 같은 지정학적인 배경은 양 측 지도자들의 발언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지난 27일 "이는 세계 2위와 4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두 거인의 이야기"라며 "이 두 거인은 진정한 윈-윈 방식으로 파트너십을 택했다. 글로벌 도전 과제에 대한 최고의 해답은 바로 협력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고 발언했다.
하루 전인 26일에는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미국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이번 무역 협정은 "인도와 EU는 관세보다는 무역 협정을 더 신뢰한다는 중요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달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EU와의 이번 협정이 새우 양식, 섬유, 보석 및 장신구 산업 등 인도 내 노동집약적 산업 분야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EU 법규 준수와 관련해 인도 측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도 말한다.
경제학자 미탈리 니코레는 "예를 들어 EU의 환경 관련 규제는 매우 엄격하다. 탄소 상쇄 메커니즘에서도 선두를 달린다"라면서 인도의 제조업 기업들이 "제대로 대비된 상태가 아닐 수 있다"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한 조치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이는 도전 과제라기보다는 기회"라고 덧붙였다.
한편 EU는 이번 인도와의 협정을 통해 경제적 압박 및 글로벌 혼란 속에서 일정한 확실성, 더 나아가 안정성을 느끼고자 한다.
EU의 외교 싱크탱크인 '유럽외교협회(ECFR)'의 앤드류 스몰 아시아 담당 이사는 비록 이번 무역 협정이 처음에 꿈꿨던 "초대형 야심작"까지는 아니더라도, 독일과 프랑스가 주요 수혜국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그러면서도 인도가 워낙 규모가 크고 성장 속도도 빠른 경제권인 만큼, 이러한 시장에 뛰어들려는 EU는 이번 협정을 종착역이 아닌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합의는 양자 관계에서 무엇이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기초 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협정의 공식 서명은 유럽의회와 각 회원국의 비준 절차가 완료된 올해 말에야 이루어질 전망이다.
다만 최근 EU가 남미 '메르코수르' 국가들과 체결한 또 다른 주요 무역협정이 유럽의회에서 좌초되면서, 이번 합의와 관련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스몰 이사는 인도와의 협정은 "양측 모두 민감한 사안은 건드리지 않아" 논란의 여지가 적다고 평가했다.
한편 이번 무역 협정과 별개로 인도와 EU는 안보와 방위 협력 및 기후 행동에 관해서도 협상을 진행 중이다.
지난 27일, 라즈나트 싱 인도 국방장관은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와 신뢰할 수 있는 방위 생태계를 구축하고 미래에 대비하는 역량을 개발하기 위한 공급망 통합의 기회 등 다양한 안보, 방위 사안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혔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양측은 해양 안보, 사이버 위협, 국방 대화 등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안보 및 방위 파트너십 초안을 마련 중이다.
한편 EU는 인도의 최대 상품 시장으로, 양자 간 상품 교역 규모는 지난 10년간 거의 2배로 증가하며 2024~25년 기준 1360억달러(약 193조원)에 달했다.
양자 간 FTA 협상은 2007년 처음 시작됐으나, 시장 접근 및 규제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리며 2013년 중단됐다. 이후 2022년 7월 공식적으로 재개됐다.
EU의 한 외교관은 BBC에 트럼프의 관세는 EU-인도 협정 체결의 "마지막 직선 주로에서 유용한 순풍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지난 7개월간 인도는 영국, 오만, 뉴질랜드와 주요 무역협정을 연이어 체결했으며,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스위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으로 구성)'과 2024년 체결한 협정은 지난해 발효됐다. 2022년에는 호주와도 무역협정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