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베조스 결혼식에 환호와 분노로 갈라져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와 방송인 로렌 산체스의 호화 결혼식 파티가 28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갈라 디너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행사 당일, 고급 호텔에 묵던 하객들이 수상택시에 오르기 시작하자 파파라치들이 카메라 셔터를 준비했고, 그와 동시에 일부 베네치아 시민들은 행사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섰다.
시위 이유는 다양했다. 과잉 관광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도시에 대한 우려에서부터, 기후변화 및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활동가들의 항의까지 여러 목소리가 뒤섞였다.
이날 수백 명의 시위대는 시내를 행진하며 베네치아의 상징인 리알토 다리에 '베조스는 설 자리가 없다(No Space for Bezos)'는 문구가 적힌 손글씨 현수막을 내걸고, 다채로운 연막탄을 터뜨렸다. 다만 악어 모양의 튜브를 타고 운하에 뛰어들어 하객들의 통행을 막으려던 계획은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제프 베조스는 점심 식사를 위해 베네치아의 유명 레스토랑 '해리스 바(Harry's Bar)'로 향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현지 기자가 시위에 대한 견해를 묻자, 그는 카메라를 향해 입맞춤을 날리며 여유롭게 반응했다.
한편 베네치아 시 부시장은 시위대에 대해 "자기애에 빠진 사람들"이라며 일축하고, 이번 결혼식이야말로 베네치아에 필요한 "고품격 관광"이라고 강조했다.
시의 경제 개발 담당 의원인 시모네 벤투리니는 "이번 일을 계기로 더 많은 사람들이 베네치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지역 웨딩 산업이 활기를 되찾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란이 아니다. 시 당국이 누가 결혼할 수 있고 누가 안 되는지를 정할 수는 없다. 우리에겐 도덕 경찰이 돌아다니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관광객들로 가득 찬 곤돌라가 그 옆을 지나가는 가운데 진행됐다.

하지만 시위대는 이미 하나의 성과를 거뒀다고 말한다.
이날 밤 열릴 예정이었던 파티는 보안상의 이유로 도심에서 더 떨어진 곳으로 장소가 옮겨졌다. 새로 정해진 장소인 '아르세날레(Arsenale)'는 보호하기 더 쉬운 곳이다.
멸종저항(Extinction Rebellion)은 기후위기에 맞서 비폭력적 직접 행동을 벌이는 국제 환경운동 단체다. 이 단체 소속의 이탈리아인 활동가 파올라는 "베네치아가 점점 놀이공원처럼 되어가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파올라는 특히 하객들이 전용기를 타고 베네치아에 온 사실에 분노했다. 그리고 "세계의 엘리트들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오염 주범"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대량 관광도 도시를 망가뜨리고 있지만, 억만장자들이 이 도시를 자기들만의 놀이공원처럼 사용하는 현실이 정말 큰 문제다"고 덧붙였다.
스타 총출동한 결혼식
이탈리아 언론은 이번 결혼식을 '올해의 결혼식(wedding of the year)'이라 부르며 그 화려함과 호화로움에 주목하고 있다.
현지 매체들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킴 카다시안 등 약 200여 명에 이르는 유명 인사들의 사진으로 지면과 SNS를 가득 채우고 있다.
오늘 밤에는 베네토식 대구 요리가 포함된 연회가 열릴 예정이며, 잉크오징어 요리가 등장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신부 로렌 산체스는 1950년대 소피아 로렌의 드레스를 연상케 하는 흰색 레이스 돌체앤가바나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공개돼 화제를 모았다.
다만, 이번 결혼식이 도시 전체를 마비시킬 것이라는 일부의 우려는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방카 트럼프와 빌 게이츠는 각각 미술관을 방문한 모습이 포착됐고, 신혼 부부 역시 베네치아 곳곳에서 다양한 의상을 입고 사진과 영상에 담겼다.
하지만 일반 관광객이나 베네치아 시민이 실제로 마주치는 인물은 셀럽들보다도, 독일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베조스 닮은꼴'에 가까운 경우가 더 많다.
도시에는 여전히 수상택시와 곤돌라가 여유 있게 대기 중이며, '로맨틱한 탑승'을 방해받은 관광객들이 항의하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결혼식 주요 행사가 열리는 지역 일부가 잠시 통제되긴 했지만, 전체적인 혼란은 크지 않았다. '베조스는 설 자리가 없다(No Space for Bezos)'라고 적힌 포스터 대부분은 철거됐고, 간헐적인 낙서만 몇 군데 눈에 띈다. 건물 외벽에 항의 문구를 투사하려던 시도도 경찰에 의해 곧바로 제지됐다.
시위대가 이날 저녁에 계획한 행진은 시 당국의 허가를 받고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다.
베네치아 시민들, 엇갈린 반응
하지만 베네치아가 관광객들의 놀이터로 변하면서, 지역 주민들이 도시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우려는 과장이 아니다.
중앙역 인근에서는 경찰이 무작위로 방문객의 하루 입장 허가증을 확인하고 있다. 인파를 통제하기 위해 새롭게 도입된 조치다.
주변 카페들은 고온다습한 날씨에 얼굴이 번들거리는 관광객들로 가득 찼고, 강한 햇볕에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른 이들도 쉽게 눈에 띄었다.
그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 광장에는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온 로베르토 자논(77)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조만간 집을 비워야 한다. 집주인이 외지 개발업자에게 주택을 매각하면서, 자논은 반려견 두 마리와 함께 퇴거 통보를 받았다.
자논은 "이제는 고향에서도 살 곳을 구하는 게 불가능하다"며 "관광객들이 더 많은 돈을 지불하니 경쟁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집 주변에 줄지어 선 나무문을 가리키며 "하나, 둘, 셋 문만 지역 주민이고, 나머지는 모두 관광용 숙소"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곳에서 진짜 베네치아 사람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집을 잃게 된 현실에 대해 "더는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친구들을 잃고, 마음의 한 조각도 함께 잃는다"며 "안타깝지만, 이 상황은 이제 멈출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제프 베조스가 결혼식 장소로 베네치아를 택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명 인사들이 내가 사랑하는 이 도시에 찾아오는 건 영광"이라며 "긍정적으로 본다"고 했다.
자논처럼 결혼식에 우호적인 시각을 보이는 시민도 적지 않다.

기념품 가게에서 자석과 티셔츠를 팔고 있는 레다는 베조스-산체스 커플의 호화 결혼식에 전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베조스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왔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질 낮은 관광'만 몰려오는데, 베네치아가 그런 대접을 받을 도시는 아니잖아요."
과거에는 고급 이탈리아 제품을 파는 가게를 운영했지만, 가격만 따지는 관광 시장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 문을 닫았다.
"요즘 관광은 저가 항공 타고 와서 아무것도 안 쓰고 가는 '치고 빠지기'식이에요. 20유로(약 3만2000원)짜리 비행기 타고 와서 커피 한 잔도 안 사요. 베네치아엔 이런 관광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결혼식이 끝나고 화려한 파티 손님들이 도시를 떠난 뒤 남는 건 무엇일까.
베네치아 시 부시장은 제프 베조스가 수상 도시인 베네치아 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에 약 300만유로(약 47억9000만원)를 기부했다고 밝혔다. 도시를 위한 상징적 지원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결혼식으로 인해 도시가 벌어들일 수 있는 3000만유로(약 479억원) 규모의 경제 효과에 대해, 환경 운동가들은 "세계 최고 부자에게는 '라군에 떨어진 한 방울 물'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멸종저항 소속 활동가 로렌조는 "베조스의 재산 규모에 비하면 300만유로는 일반인에게 3유로(약 4800원) 수준에 불과하다"며 "결코 큰돈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