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왜 지금 개헌을 말할까?
'비상계엄' 사태 이후 현행 대통령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헌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치권을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여권에서는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 오세훈 서울시장이, 야권에서는 김부겸 전 국무총리, 김두관 전 의원, 조국혁신당 등이 직접 개헌을 언급하거나 필요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내놨다. 우원식 국회의장도 지난 19일 외신기자회견에서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탄핵 국면이야말로 1987년 개헌 이후 37년간 바뀌지 않은 헌법을 손볼 기회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현재의 개헌 논의가 정략적인 카드로 남발되고 있어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는 회의론도 존재한다.
왜 지금 개헌일까?
계엄 사태 이후 개헌의 필요성이 언급되는 주요 이유로는 대통령 권한이 너무 강하다는 우려가 있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개헌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내비친 바 있는 김진표 전 국회의장은 BBC 코리아와의 통화에서 "현재 헌법 체제 하에서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권한이 너무 세고, 잘못하면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이 이번에 확인된 것"이라 전했다.
현재 개헌 논의의 핵심은 '4년 중임제'와 '대통령 권한 축소'다. 김 전 의장은 특히 4년 중임제에 대해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2년 차이를 두고 하면 중간평가 성격이 된다"며 "4년 중임제가 비교적 합의가 된 안"이라고 설명한다.
개헌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쪽은 여권이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지난 18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의 상견례에서 "전부 아니면 전무 게임인 대통령제를 좀 더 많은 국민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고 상생과 협력을 할 수 있는 제도로의 변경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유승민 전 의원은 지난 22일 MBN 뉴스에 출연해 "1987년 체제가 완전히 무너졌다"며 "(대통령) 4년 중임으로 개헌해서 5년 단임제의 폐해를 시정하되 폭정으로 가지 못하도록 감시·견제하는 장치를 헌법안에 많이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23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승자독식의 의회폭거와 제왕적 대통령제를 허용하는 이른바 87헌법체제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며 개헌을 주장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여권의 이같은 주장이 현 상황에 대한 시선 돌리기라 맞서고 있다.
민주당 정성호 의원은 19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여당의 개헌 논의가 "시선 돌리기"라고 비판했다.
추미애 의원도 SBS 라디오에 출연해 "지금 탄핵에 협조하기 싫으니까 보이콧하는 차원에서 개헌을 꺼낸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개헌 필요성도 모두 공감하기 때문에 그건 별도로, 빨리 탄핵을 하고 나면 별도로 개헌 논의를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 여야 모두 계엄사태 이전부터 개헌을 정치적 카드로 이용해왔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난 2016년 '국정농단' 사태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질서 있는 퇴진'을 주장하며 탄핵 대신 대통령의 임기 단축 개헌을 제안한 바 있다.
지난 11월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일부 의원들은 '임기단축 개헌 의원 모임'을 만들어 개헌을 통한 윤 대통령의 임기 단축을 추진한 바 있다.
계엄 이후엔 국민의힘의 일부 소장파 의원들이 탄핵 대신 이 임기단축 개헌을 제안하기도 했다.
'모두가 얘기하고 아무도 실현 못 한' 개헌
"모두가 개헌에 대해 얘기는 다 했다고 보시면 돼요. 아무도 실현하지 않은 거지."
박상훈 정치학자는 현행 87년 헌법의 초기부터 개헌 논의가 있어왔지만 한 번도 성사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87년 헌법 초기에만 해도 여야가 내각제 개헌에 대해 합의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됐어요."
그의 말대로 본격적인 개헌 논의의 시작은 1990년 '3당 합당', 즉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과 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며 민주자유당(민자당)을 만들던 때였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상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는 '내각제 개헌'에 비밀리에 합의했다. 그런데 이후 언론에 이 내각제 합의서가 공개되자 김영삼 당시 민자당 총재는 "내각제 약속이 국민 위에 있을 수 없다"며 반대의 뜻을 내비쳤다. 이에 노 전 대통령이 내각제 추진을 포기하겠다고 발표하며 개헌은 실패로 돌아갔다.
1997년 대선에서도 당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는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연대를 추진하며 내각제 개헌을 약속했지만, 김 전 대통령의 집권 후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도 모두 개헌을 약속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탄핵 국면에서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개헌에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개헌안은 당시 야당이던 자유한국당이 "개헌의 국민적 논의와 사회 공론화를 결여했다"며 반대해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개헌이 어려운 이유
박 정치학자는 "대부분의 대통령이 임기 말에 영향력이 줄어들면 개헌 얘기를 했다"면서 "야당은 또 선거가 앞이니까 그 안을 받지 않는 식"으로 악순환이 반복돼왔다고 말한다.
이선우 전북대 정치학과 교수는 개헌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유에 대해 "정치적 양극화가 심하다"는 점과 "개헌에 대한 합의가 미성숙해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교수는 지난 7월 국회에서 열린 개헌 토론회에서 "한국에서 특정한 정당이 개헌을 시도할 시 방향이나 내용의 타당성과는 상관 없이 반대 정당에게 거의 무조건적으로 거부당할 위험이 매우 크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교수는 또 BBC와의 통화에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 등에 대해 의견이 합치되지 않는다"면서 개헌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여전히 부족한 상태라고 말했다.
김 전 국회의장은 한국의 헌법 개정 요건이 "세계적으로 가장 어렵다"고 지적한다. 국회 재적인원의 3분의 2의 동의를 받은 후 국민투표를 거쳐야 하는 현 제도가 개헌을 어렵게 하는 한 요인이라고 김 전 의장은 말한다.
현행 개헌 절차는 다음과 같다. 대통령이나 국회 재적인원 과반수의 발의로 제안된 개헌안은 법사위를 거쳐 본회의에 상정된다. 이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되면 30일 이내에 국민투표를 거쳐야 하는데, 이때 국회의원 선거권자의 과반수가 투표에 참여하고 이중 과반수가 찬성해야 헌법개정안이 확정된다.
김 전 의장은 우선 국회에서부터 "3분의 2이상의 동의를 얻기가 힘들다"며, "1당이 개헌을 추진하면 제2 당에서는 반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국민투표도 현실적으로 통과가 쉽지 않다고 김 전 의장은 말한다.
"역대 (선거가 아닌) 국민투표 참여율이 가장 높았던 것이 오세훈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국민투표였는데, 그게 27.5%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족수도 채우지 못 하고 부결이 돼버렸어요."
그는 이렇게 헌법 개정 요건이 까다로운 이유에 대해 과거 독재 경험을 이야기했다.
"과거 박정희, 이승만 전 대통령이 삼선 개헌을 했던 경험 때문에 (1987년 개헌) 당시엔 무조건 고치기 어렵게 만들었던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개헌 논의' 시작되는 것은 좋지만 섣부른 진행은 경계해야
전문가들은 개헌 논의가 필요하지만 섣부르게 흘러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박상훈 정치학자는 "개헌에 대해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면서도 "현재의 개헌 논의는 붕 떠있는 상태"라고 짚었다.
그는 "(현행 대통령제의 문제에 대해) 정치학계에서 논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여야 간에 개헌특위 안에서 논쟁을 하고 있는 상태도 아니"라며, 그 결과 "내각제나 의회중심제 등 정부 형태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고 덧붙였다.
지난 11월 국회에선 우원식 의장 주도로 '국민 미래 개헌 자문위원회'가 출범했으나 현재 여당측 추천인사 없이 의장 지명인사들과 야당측 추천인사들만으로 활동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김하열 교수는 "지금은 비정상적인 상황이니까 상황을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정치권 위주로 성급하게 개헌을 추진하기 보다는 정국이 안정되고 헌정 질서가 바로잡힌 후에 신중하게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전했다.
그는 "87년 개헌이 나름 의미가 있지만 그때 국민적인 참여가 부족했다는 것이 현재의 평가"라면서 "이번에 또 그런 절차를 밟을 수 없지 않냐"고 말했다.
김 전 의장은 "국민의 80~90%가 모두 찬성하는 개헌안 의제를 갖고 먼저 합의해서 개헌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