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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최악의 재난' 인도양 쓰나미 20주년...쓰나미 현장을 기억하다

1일 전
쓰나미로 물에 잠긴 마을
Getty Images
당시 쓰나미로 인해 저지대 지역의 수많은 민가가 침수되었다

그날은 20년 전인 2004년 박싱데이(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이었다.

지진 발생 시각인 이날 새벽 6시 30분, 나는 페리를 타고 인도 벵골만의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에 속한 헤브록 섬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섬의 라다나가르 해변은 은빛 모래와 맑고 푸른 바닷물이 인상적인 곳으로, 최근 '타임지'가 '아시아 최고 해변'으로 선정했을 정도로 아름답다.

대학 시절 친했던 친구가 당시 가족들과 함께 이 제도의 수도인 포트 블레어에 10년 반째 살고 있었으나, 내게는 첫 방문이었다. 내가 이 제도에 도착한 것은 2일 전인 24일이었다.

우리는 헤브록 섬에서 3일을 보낼 계획이었다. 아침부터 간식과 샌드위치를 챙기고, 신이 난 아이들과 함께 포트 블레어의 피닉스 베이 부두에서 페리를 탔다.

아무것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전면 갑판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재앙이 들이닥쳤다.

항구를 빠져나온 우리 배는 갑자기 휘청거리더니 갑자기 우리가 방금 이용했던 부두 옆 부분이 허물어지며 바다로 무너져 내렸다. 이어 망루탑과 전봇대도 차례대로 쓰러졌다.

두 눈을 의심할 만한 장면이었다. 내 옆에 서 있던 수십 명도 그저 입을 벌린 채 지켜보고 있었다.

다행히 당시 부두에는 사람이 없었기에 인명 피해는 없었다. 30분 뒤 다른 배가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여행객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물에 떠내려가는 부두의 모습
Getty Images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 부두의 약 94%가 당시 파괴된 것으로 추측된다

페리의 승조원은 내게 지진이 났다고 했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규모 9.1의 지진으로, 전 세계에서 3번째로 강력한 지진이자, 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파괴적인 지진으로 기록된 사건이다.

인도양 수마트라섬 북서부 해안에서 발생한 이 지진은 엄청난 쓰나미를 일으켰고,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인도, 몰디브, 태국 등 12개국에서 약 22만8000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막대한 재산 피해로 이어졌다.

진앙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에서는 약 15분 후 최고 15m 높이의 쓰나미가 육지를 덮치면서 광범위한 피해를 보았다.

공식 사망자 수는 1310명으로 집계되었으나, 5600명 이상이 실종되거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기에 사망한 섬 주민은 7000명을 웃도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배에 타고 있던 우리는 주변에서 어떤 파괴와 피해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바다 한가운데서 휴대전화도 작동하지 않았고, 그저 승조원들로부터 단편적인 정보만을 들을 수 있었다. 스리랑카, 발리, 태국, 몰디브, 인도 남부 해안 도시인 나가파티남이 피해를 보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의 모습
BBC
항구를 빠져나오자마자 우리가 탄 배가 흔들리더니 갑자기 방금 우리가 탑승했던 부두 바로 옆 부분이 바다로 무너져내렸다

그러나 인도 본토에서 동쪽으로 약 1500km 떨어진, 벵골만에 흩어져 있는 수백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에 대한 소식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 제도에서도 사람이 사는 섬은 고작 38개에 불과했다.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는 수천 년간 외부 세계와 고립된 채 수렵 채집 활동으로 살아온 원주민 집단 6개를 포함해 총 40만 명의 집이었다.

제도 내 섬으로 향하는 유일한 수단은 페리뿐이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에 따르면 이 지역 부두의 약 94%가 이때 파괴됐다고 한다.

2004년 12월 26일 우리가 헤브록 섬에 도착하지 못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곳의 부두가 무너져 물속에 잠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탄 배는 방향을 돌려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안전상의 이유로 포트 블레어 정박 허가를 받지 못하면 정박지에서 밤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이 때문에 대부분 햇살과 모래사장을 기대하던 관광객들로 구성된 승객들은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큰 구멍이 난 도로
Getty Images
포트 블레어의 모습. 건물은 모두 무너져내렸으며, 길 한가운데는 소형 배들이 뒤집힌 채로 널브러져 있었으며, 도로에는 큰 구멍이 나 있었다

거친 바다를 몇 시간 동안 까닥거린 우리는 포트 블레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전에 발생한 피해로 피닉스 베이가 폐쇄되었기에 포트 블레어의 또 다른 항구인 채텀으로 이동해야 했다. 우리가 내린 부두를 둘러보니 곳곳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 주변 건물은 무너져 내렸으며, 길 한가운데는 변했고, 길 한가운데는 소형 배들이 뒤집힌 채로 널브러져 있었으며, 도로는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저지대에서는 해일로 집이 침수되어 주민 수천 명이 순식간에 살 곳을 잃었다.

한 9살 소녀는 집이 물로 가득 차 거의 익사할 뻔했다는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한 여성은 눈 깜짝할 사이에 평생 모은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토로했다.

길가에 천막을 치고 지내는 사람들의 모습
Getty Images
주민 수천 명이 쓰나미로 집을 잃고 거리에 나앉게 됐다

이후 3주 동안 나는 이번 재난과 주민들이 입은 피해 상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가 쓰나미로 이토록 큰 피해를 입은 최초의 사례로, 비극의 규모는 숨이 막힐 정도로 컸다.

바닷물로 수많은 담수 공급원이 오염됐으며, 경작지의 대부분도 파괴됐다. 부두가 망가지는 바람에 섬으로 생필품을 공급하기도 힘들었다.

인도 당국이 나서 대대적인 구호 및 구조활동을 펼쳤다. 육군, 해군, 공군이 모두 투입되었으나, 제도 내 섬들에 도착하기까지는 며칠이 소요됐다.

포트 블레어에는 쓰나미로 집을 잃은 다른 섬 주민들을 실은 해군과 해안 경비대 선박이 매일같이 들어왔고, 이곳의 학교와 정부 건물은 임시 대피소로 바뀌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던 섬이 얼마나 대대적으로 파괴됐는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등에 짊어진 옷가지만 겨우 챙겨 탈출했다는 이들이 많았다.

카 니코바 섬 출신인 한 여성은 지진이 발생했을 때 바다에서 파도가 밀려왔으며, 동시에 땅에서는 거품이 낀 물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이 여성과 같은 마을 주민 수백 명은 48시간 동안 먹고 마실 것도 없이 구조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 여성은 자신과 생후 20일 된 아기가 살아남은 것은 그저 "기적"이라고 했다.

포트 블레어는 거의 매일 여진으로 땅이 흔들렸으며, 그중 일부는 또 새로운 쓰나미를 일으키는 것 아니냐는 소문을 일으킬 정도로 강했던 탓에 일부 사람들은 겁에 질려 고지대로 도망치기도 했다.

구조 작업 모습
Getty Images
카 니코바의 인도 공군 기지는 해일로 인해 무너져내렸다

며칠 후, 인도 군은 카 니코바로 기자들을 실어 날랐다. 대형 인도 공군 기지가 있던 이 섬은 원래 아름다운 해변으로 유명한, 지대가 평평하고 비옥한 섬이다.

그러나 막강한 쓰나미는 공군 기지를 완전히 휩쓸어버렸다. 이곳에서는 12m 높이의 쓰나미가 들이닥쳐 주민 대부분이 잠을 자는 동안 쓸려 내려갔다. 이 섬에서만 100명이 숨졌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공군 장교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기자들은 이 섬의 말라카, 카칸 마을을 방문했다. 이 마을 역시 자연의 분노를 피해 가지 못했던 탓에 주민들은 도로를 따라 텐트를 치고 살고 있었다. 일부 주민들은 쓰나미로 인해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슬픔에 잠긴 한 젊은 부부는 생후 5개월 된 아기는 가까스로 구해냈으나, 각각 7살과 12살 난 자녀들은 모두 떠내려갔다고 토로했다.

사방이 코코넛 야자수로 둘러싸인 민가는 잔해에 불과했다. 여기저기 옷가지, 교과서, 아이 신발, 음악용 키보드 등 주민들의 개인 소지품이 흩어져 있었다.

도로 로터리에 설치된 인도 국부 마하트마 간디의 흉상만이 놀랍게도 유일하게 멀쩡하게 서 있었다.

실종자 명단에서 이름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
Getty Images
수천 명이 쓰나미로 실종돼 지금껏 발견되지 못하고 있다

한 고위 육군 장교는 이날 자신의 팀은 시신 7구를 수습했다고 했다. 우리는 멀리서 희생자들이 집단 화장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공군 기지에서는 구조대원들이 잔해를 비집고 어느 여성의 시신을 꺼내는 모습을 목격했다. 한 관계자에 따르면 카 니코바에서는 흔적도 없이 파도에 휩쓸려 사망한 이들도 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가끔 페리를 타고 헤브록 섬으로 가던 그날을 생각하곤 한다.

지진이 몇 분만 더 일찍 발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페리를 타고자 부두에서 기다리는 동안 쓰나미가 해안에 몰려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2004년 박싱데이, 나는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이날 목숨을 잃은 수천 명은 이렇게 운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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