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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동성애자 아이돌'입니다

6시간 전

"떨리는 건 하나도 없었어요.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말하고 싶었어요."

K팝 보이그룹 '저스트비(Just B)'의 멤버 배인은 지난 4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공연 무대에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저는 게이로서 LGBTQ+ 커뮤니티의 일원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배인의 커밍아웃에 팬들은 뜨거운 환호로 응답하고, 객석에서는 무지개 깃발이 흔들렸다.

곧바로 이어진 무대에서 그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는 메시지를 담은 레이디 가가의 '본디스웨이(Born This Way)'를 열창했다.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해요. 팬들이 엄청난 환호를 보내주셨고, 제가 처음으로 제 자신으로 완전히 서 있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는 많은 감정이 오갔다며 "나 이대로도 괜찮구나"라는 걸 깊이 느낀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저스트비는 2021년 데뷔한 6인조 K팝 보이그룹이며, 2001년생 배인은 팀에서 메인보컬을 맡고 있다.

당초 커밍아웃은 계획된 일이 아니었다.

배인은 해외 투어 중 솔로 무대를 준비하며 '이번 무대에서 나를 드러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고 했다. 무대를 거듭하며 팬들의 응원을 받았고, 점점 용기를 얻게 됐다고 말했다.

LA 공연을 하루 앞둔 날, 배인은 멤버들과 소속사에 커밍아웃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모두가 흔쾌히 "좋다, 해보자"고 응답했다. 특히 소속사 대표는 "때가 됐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기대된다"고 말하며 그의 결정에 힘을 실어줬다고 한다.

배인의 커밍아웃은 K팝 남자 아이돌 중 최초다.

앞서 걸그룹 와썹 출신 지애와 하이브의 다국적 걸그룹 캣츠아이의 멤버 라라와 메간이 성정체성을 밝힌 바 있지만, 한국 국적의 남자 아이돌 그룹 멤버가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K팝 보이그룹 저스트비의 멤버 배인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월드투어 무대에서 커밍아웃을 했다
블루닷엔터테인먼트
배인의 커밍아웃은 K팝 남자 아이돌 중 최초다

'나는 아이돌을 해선 안 되는 사람이구나'

"아이돌이란 직업을 해선 안 되는 사람이구나. 근데 내가 꾸역꾸역 여기까지 숨기면서 왔구나."

배인은 오랜 시간 자신의 중요한 일부분을 숨기며 살아왔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무렵, 자신이 동성에게 끌린다는 사실을 처음 자각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부터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그 감정을 감추게 됐다.

"그때는 '그냥 그렇게 안 보이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좀 슬픈 일이죠."

연습생 시절, 배인은 자신이 성정체성을 감추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주변에 물어볼 사람도 없고, 고민을 깊이 할 겨를도 없이 그는 그저 "안 되는 일"이라 여긴 채 데뷔를 했다. 데뷔 이후에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침묵하는 데 익숙해졌다.

하지만 데뷔 2년 차, 억눌러 왔던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고 지난 5월 BBC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어느 순간 모든 게 확 한번에 왔어요. '나는 지금 모두를 속이고 있구나. 멤버들, 회사, 친구들, 가족, 대중까지. 나는 거짓말을 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구나.'" 그는 당시 자신이 "죄인처럼" 느껴졌다고 털어놨다.

정체성과 직업 사이에서 오래 고민하던 그는 가족과 멤버들, 소속사에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털어놨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설 수 있는 자리가 조금씩 생겨났다고 전했다.

'팀에 피해가 되는 건 아닌가'

K팝 보이그룹 저스트비
블루닷엔터테인먼트
저스트비는 2021년 데뷔한 6인조 K팝 보이그룹이다. 힙합과 팝 기반의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활동해 왔다

커밍아웃 이후, 그는 부정적인 반응들도 함께 마주해야 했다.

'팀에 피해가 되는 건 아니냐', '커밍아웃은 소속사와 협의된 것이냐', 심지어는 가족을 언급하며 상처를 주는 댓글도 있었다.

특히 자신의 생일을 앞두고 '너희 어머니는 이런 너를 낳고도 미역국을 드셨단다'라는 악플은 그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배인은 이런 반응들을 어느 정도는 예상 했다고 한다. 일부 팬이 등을 돌릴 수도 있다는 점도, 팀 전체가 함께 감당해야 할 무게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무엇보다 자신으로 인해 팀 멤버들이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에 미안함이 컸다고 말했다.

하지만 몇 개의 악플보다 자신을 응원하는 수많은 메시지들이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고, 팀과 소속사가 자신을 이해하고 지지해준 것이 큰 힘이 됐다고 밝혔다.

특히 멤버 시우는 배인의 커밍아웃 이후 "너의 자신감 있는 모습에 감동받았다"고 말해줬고, 배인은 그 응원이 커밍아웃을 했던 순간보다도 더 큰 감동이었다고 회상했다.

민용준 대중문화평론가는 한국 아이돌 산업의 구조적 특성상 남성 아이돌이 성정체성을 공개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특히 남성 아이돌의 경우 여성 팬들의 이성적 감정 이입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구조 안에서 남성 아이돌이 동성애자임을 밝힐 경우, 팬과의 관계가 더 이상 "이성적 상상 위에 놓이지 않는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과거에 비해 사회 전반의 성소수자 인식은 점차 생기고 있지만, 한국 연예계에서 여전히 보수적인 면이 남아 있다고 전했다.

커밍아웃 이후, 가장 크게 바뀐 건?

저스트비 멤버 배인
BBC Korean/최정민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바꿀 수 있다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보는 시선에 대해 배인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선택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남자를 좋아해야겠다고 먼저 결심하고 좋아한 게 아니라며, 그런 감정은 자연스럽게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배인은 커밍아웃 이후 가장 크게 바뀐 점으로 '자신'을 꼽았다.

"사실 아직도 제가 커밍아웃을 했다는 게 완전히 실감나진 않아요. 워낙 오랫동안 '이성애자인 척'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은 안해요. 그래도 자신감이 많이 생겼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도 더는 숨기지 않으려 해요. 그런 점에서 제가 많이 변했다는 걸 느껴요."

또 다른 변화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세이프존(안전지대)'이 되었다는 것이다. 커밍아웃 이후, 많은 팬들이 "나도 게이야", "나도 레즈비언이야", "나도 LGBTQ 일원이야"라고 고백하며, "당신 덕분에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배인은 앞으로 '동성애자 아이돌'로 불리게 될 것에 대한 부담감이 없진 않았다고 전했다. 자신을 음악보다 커밍아웃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이 많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냥 커밍아웃한 K팝 남자 아이돌"로만 남을지, 그 이후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는 결국 자신의 몫이지 않냐며, "잘 살아가는 모습,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전했다.

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는 "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모든 걸 숨기려 해온 K팝의 역사가 25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며 배인의 커밍아웃은 "이 구조를 무너뜨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팬덤의 소비 심리를 극대화하기 위해 성을 끝까지 숨기는 방식이 건강하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런 솔직한 시도가 더 많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성정체성을 밝히는 게 대단한 일이 아니길'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성소수자와 지지자들이 무지개 깃발을 들고 프라이드 퍼레이드를 행진하고 있다
Reuters/Soo-hyeon Kim
지난 14일,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성소수자와 지지자들이 무지개 깃발을 들고 프라이드 퍼레이드를 행진하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케이팝 산업은 아티스트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조심스러운 공간이었다.

배인은 단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큰 관심을 받는 현실이 "약간 슬펐다"고 털어놨다. 그에게 커밍아웃은 특별한 선언이라기보다 개인의 삶에 대한 솔직한 표현이었지만, 여전히 케이팝 산업 안에서는 큰 이슈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 복잡한 감정을 남겼다.

그는 언젠가 성 정체성이 "대단한 일"이 아닌, "아, 그렇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한 음악 안에서도 더 이상 자신을 감출 필요가 없는 환경,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무대를 꿈꾼다고 전했다.

배인은 작사와 작곡을 할 수 있지만, 지금껏 사랑 노래를 쓸 때면 '그녀가 좋았다' 등 'she(그녀)'나 'her' 같은 단어를 선택해 왔다고 전했다. 결국 '누군가에게 들려줘야 하는 노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커밍아웃 이후,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고 솔직한 이야기를 음악에도 담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했다.

"앞으로는 (사랑 노래의 대상에) 'he(그)'라는 단어도 자연스럽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웃음) 성적 지향뿐 아니라, 힘들었던 순간이나 행복했던 기억들도 필터 없이, 틀 없이 곡에 잘 담아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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