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헬멧 논란 … 우크라 선수가 올림픽 출전자격을 박탈당한 이유는?
2026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에서 가장 크게 논란이 된 사안이 지난 12일(현지시간) 아침 절정에 달했다. 우크라이나의 스켈레톤 선수 블라디슬라브 헤라스케비치가 출전 금지 처분을 받은 것이다.
개막식에서 기수를 맡기도 했던 헤라스케비치는 러시아 침공으로 희생된 자국 선수들의 사진을 담은 헬멧을 착용하고 경기에 나서고자 했다.
그러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이를 올림픽 헌장 위반으로 판단했고, 지난 10일 해당 헬멧을 착용은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이후 2일간 이어진 논의에서도 헤라스케비치는 물러서지 않았고, 12일 아침 결국 출전 자격을 박탈당했다.
지금까지 반응은?
헤라스케비치의 실격 소식에 여러 전현직 올림픽 선수들은 충격에 휩싸였으며,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영국의 올림픽 스켈레톤 금메달 2회 우승자인 리지 야놀드는 BBC 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정말 충격적이다. 스켈레톤계는 지금 충격과 혼란 속에 있다"고 말했다.
"(이 헬멧 착용은) 선수에게 매우 감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추모의 뜻을 담은 행위였습니다."
"IOC는 그에게 사과해야 하며, 이는 잘못된 결정입니다."
마찬가지로 영국 대표팀 출신으로 올림픽 봅슬레이 메달 획득 경험이 있는 존 잭슨 역시 IOC의 이번 결정에 실망을 표했다.
영국 해병대 '코만도' 출신이기도 한 잭슨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사망한 이들을 기리고자 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참전용사들과 마찬가지로, 군인이자 참전용사인 제게는 망자에 대한 추모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 전투에서 친구나 동료를 잃었고, 궁극적인 희생을 치른 탓에 이 세상에 더는 없는 누군가를 알고 있습니다."
"(헤라스케비치가) 이루려 했던 일을 저는 지지합니다. 결국 발생하지 않아도 될 일로 인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한편 헤라스케비치는 BBC에 출전 금지 처분에 "공허함"만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어제도, 그저께도 계속 훈련에 임했다"는 그는 "이 종목에서 메달을 딸 수도 있었는데 내가 동의하지 않는 규칙 해석 때문에 갑자기 경기에 참가조차 할 수 없게 됐다"고 덧붙였다.
"(올림픽 헌장의) 표현 지침이라니, 대체 무엇이 '표현'입니까? 여기 선수들마다 헬멧 색상도 다른데, 이것도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국가의 상징을 달고 있는 선수들도 있습니다 .이 또한 표현이죠.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들의 헬멧은 논란의 대상이 아니고, 경기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아닙니다."
"저는 그들의 희생을 기리고 싶기에, (숨진) 이들이 이곳에 있을 자격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과 유가족을 기리고 싶습니다."
한편 헤라스케비치의 동료 선수들은 지난 12일 이탈리아에서 열린 경기 내내 지지를 보냈다.
알파인 스키 선수인 드미트로 셰피우크는 경기 후 '우크라이나 영웅들은 우리와 함께한다'라는 메모를 공개했고, 루지 선수 올레나 스마하는 "추모는 위반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장갑을 착용하며 연대했다.
헤라스케비치의 실격 소식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IOC를 향해 "러시아 침략자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X를 통해 "스포츠는 망각해서는 안 된다. 올림픽 운동은 전쟁을 막는 데 기여해야지, 침략자들의 손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유감스럽게도 블라디슬라프 헤라스케비치 선수를 실격시킨 IOC의 결정은 그 정반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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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OC의 규정은?
헤라스케비치는 대회 시작 전 모든 연습 레이스에서 해당 헬멧을 착용했으며, 미디어 존과 여러 인터뷰에서도 이를 계속 들고 다녔다.
그러나 IOC 규정에 따라 공식적인 본경기에서는 착용할 수 없었다.
IOC는 올림픽 헌장 제40.2조를 근거로 제시했다. '올림픽 대회에 참가하는 모든 선수, 팀 관계자는 '올림픽 가치'와 '올림픽 정신'의 기본 원칙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IOC 집행위원회가 정한 지침에 따라 표현의 자유를 누린다'는 내용이다.
이는 2023년에 마련돼 올림픽 규정에 반영된, 선수들의 표현에 관한 지침이다.
해당 지침은 '올림픽 경기의 초점은 선수들의 경기력, 스포츠, 대회가 추구하는 화합에 맞춰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올림픽에서의 스포츠는 정치, 종교 및 기타 모든 형태의 개입으로부터 중립을 유지하고 분리돼야 한다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특히, 경기와 시상식에서의 초점은 선수들의 경기력을 축하하는 데 맞춰져야 한다."
해당 지침에 따르면 선수들은 올림픽 기간 언론 인터뷰나 SNS, 경기 시작 시 선수 소개 시간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 다만 경기 도중이나 시상식, 공식 올림픽 선수촌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금지된다.
이 규정을 위반할 경우 참가자는 "IOC의 징계 절차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IOC는 경기장 내 초점은 스포츠에 맞춰져야 한다며, 선수 4500명과 합의를 거쳐 결정한 사항이라고 밝혔다.
당초 IOC는 "어떠한 형태의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선전행위도 경기장을 비롯한 시설과 기타 지역에서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명시한 제50조가 이번 실격의 근거라고 잘못 주장하기도 했다.
IOC의 반응은?
커스티 코번트리 IOC 위원장은 경기 당일 오전 7시 30분 코르티나에서 헤라스케비치 선수와 그의 아버지를 만나 해당 헬멧 착용을 포기해 달라며 마지막 설득에 나섰다.
코번트리 위원장은 오랫동안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이어갔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헬멧이 담고 있는) 메시지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메시지는 강력한 추모와 기억의 메시지이며, 그 누구도 그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선수 본인도 경기중에는 화면이 흐려져서 헬멧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기에 오늘 아침, 저는 선수와 선수의 아버지에게 '선수가 경기에 나서기 전, 그의 메시지와 헬멧에 경의를 표할 방안을 마련하고, 경주가 끝나자마자 인터뷰 구역으로 이동해 모두가 사진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해결책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저는 진심으로 이 선수가 경기에 나서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감정이 북받치는 아침이었습니다."
코벤트리 위원장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포착됐다. 그 역시 전직 올림픽 선수로, 짐바브웨 대표로 수영 부문에서 금메달 2개를 목에 걸었다.
한편 IOC는 헤라스케비치의 출입 자격은 복원해 그가 남은 올림픽 기간 계속 경기장 및 선수촌에 머물 수 있도록 허용했다.
12일 오전 열린 긴장된 기자회견에서 마크 애덤스 IOC 대변인은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유니폼 착용을 허용하면 올림픽이 악용될 수 있다"며 헤라스케비치 출전 금지 조치를 옹호했다.
애덤스 대변인은 "적십자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에는 130개의 분쟁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면서 "우리는 이 분쟁들이 올림픽에서 경쟁하도록 용납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되면) 경기장이 표현의 장으로 변할 수 있으며, 이는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선수들이 정치적 지도자들의 압박을 받아 경기 중 표현을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정한 경기장을 만들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습니다."
또한 애덤스 대변인은 러시아 올림픽 위원회나 정부로부터 IOC가 압력을 받아 헤라스케비치 선수의 출전을 금지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한편 헤라스케비치 선수는 이번 결정에 불복하며 스포츠 중재 재판소(CAS)에 긴급 항소를 제기했다.
CAS는 올림픽 기간 중 임시 위원회를 소집할 수 있기에 그의 항소는 즉시 심리될 예정이다. 다만 BBC 스포츠에 따르면 현재 결정 시한은 정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