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권' vs '이동권' 고령운전 논란 계속되는 이유
1일 서울 중구 시청역 인근 교차로에서 68세 남성이 몰던 차량이 보행자를 덮쳐 9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와 관련해 고령 운전자의 면허 자격 논란이 다시 불붙는 모양새다.
경찰에 따르면 사고를 낸 차량 운전자 A씨는 일방통행인 4차선 도로를 약 200m 역주행하던 중 차량 2대를 잇달아 들이받고 인도와 횡단보도에 있던 보행자들을 덮쳤다.
운전자 A씨는 차량 ‘급발진’이 사고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상당수 전문가는 목격자 진술과 CCTV 등을 근거로 운전자의 부주의 등이 원인일 수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급발진은 차량이 운전자의 조작에 상관없이 급가속을 일으키는 현상으로 일종의 차량 결함을 말한다.
사고 직후 경찰이 시행한 검사에 따르면 A씨는 음주 상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에 따라 사고 원인은 A씨 주장대로 급발진이거나 운전 미숙, 부주의 등 운전자 과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사고 원인이 밝혀지기까지는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급증한 고령 운전 사고
한국에서 최근 인구 고령화와 맞물려 고령 운전자의 교통사고 발생이 늘면서 안전 대책 강화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실제로 도로교통공단 자료에 따르면 고령 운전자의 사고는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65세 이상 운전자가 가해자인 교통사고는 3만9614건으로 3년 연속 증가했다. 이는 통계 집계 이래로 가장 높은 수치다.
최근에 일어난 대표적인 사고로, 지난 2월 서울 은평구 연신내역 인근 도로에서 79세 운전자가 몰던 차량이 9중 연쇄 추돌 사고를 내 70대 남성이 사망하고 13명이 다친 바 있다.
지난 3월에는 서울 강남구 양재대로 구룡터널 교차로 인근에서 80대 남성이 운전 부주의로 7중 연쇄 추돌사고를 일으켰다. 또 4월에는 경기 성남시 판교노인종합복지관 주차장에서 90대 운전자가 운전 미숙으로 후진 중 노인 4명을 덮쳐 1명이 숨졌다.
이동권과 안전권
고령 운전자에 대한 면허 자격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확산하는 가운데, 전문가들 사이에선 고령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인지 능력 등 건강 상태라는 지적도 많다.
특히 이번 사고와 관련해 운전자가 68세라는 점에서, 인지 능력이나 판단 능력이 완전히 떨어지는 나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목소리도 있다.
오산대학교 문학훈 교수는 BBC 코리아와의 통화에서 "65세 이상 고령자는 운전에 무조건 문제가 있고, 65세 이하는 그렇지 않다고 이분법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며 "젊은 사람들도 운전이 미숙하거나 안 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령 운전자 면허 자격을 강화할 경우 65세 이상 국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상당한 불편을 초래할 수 있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자칫 노인의 이동권을 제한하는 조치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택시 기사 등 생계유지를 위해 운전을 하는 노인들에게는 생계와 직결된 문제라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올해 5월에는 고령자에 대한 '조건부 운전면허'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가 비판 여론이 거세자 하루 만에 '고위험자' 대상이라고 입장을 변경한 바 있다.
반면 고령자 운전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는 관련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확산하고 있다. 고령자 생활의 편의 및 이동권보다는 시민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각 지자체는 운전면허를 반납하는 고령자에게 10만원에서 30만원의 보상을 제공하며 자진 반납을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면허를 반납하는 비율은 2% 안팎에 그친다.
이 때문에 고령 운전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운전능력 검사 주기를 단축하거나 제한 속도를 설정하는 등 실질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정부는 운전 능력이 저하된 고위험군 운전자를 대상으로 야간운전 금지, 고속도로 운전 금지, 속도제한 등의 조건을 걸어 면허를 허용하는 '조건부 면허제' 도입도 검토하고 있다.
해외 사례
해외 여러 나라들은 고령 운전자의 면허 반납을 유도하면서도, 고령자의 이동성과 교통안전의 균형을 맞추는 정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본은 2022년부터 75세 이상 고령 운전자의 경우, 자동 브레이크 기능이 있는 ‘서포트카’에 한해 운전을 허가하는 한정 면허를 발급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71세 이상자의 면허 갱신 주기는 3년으로 정하고 있고, 70세 이상은 갱신 시 고령자 강습을 수강해야 한다.
영국은 70세가 되면 운전면허가 만료되고 이후 3년을 주기로 면허를 갱신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고령자 운전적성정밀검사 규정도 두고 있다.
프랑스는 76세 이상 고령자에게 매년 적성검사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고, 60~75세의 경우 2년마다 검사를 받아야 한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에서 75세 이상자는 매년 운전 적합성에 대한 의료 평가 및 운전 실기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한국 정부는 현재 만 75세 이상 고령 운전자들의 운전면허 갱신 주기를 3년으로 하고, 면허를 갱신하려면 인지능력 검사와 교통안전교육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하고 있다. 만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도 교통안전교육 권장 대상이다.
이에 대해 문학훈 교수는 “운전면허 갱신 주기를 줄인다고 해서 고령 운전자 사고를 해결할 수는 없고, 국가건강검진을 1년마다 시행할 때 인지능력 검사 등 운전에 필요한 구체적인 검사를 시행할 필요가 있다”면서 “미국 같은 경우는 75세 이상 고령 운전자는 고속도로 운전을 금지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인지 검사를 통해 특정 지역이나 고속도로 운전을 금지하는 정책을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