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 러시아 전투기 영공 침범에 나토 협의 요청

에스토니아 정부가 자국 영공을 침범한 러시아 전투기와 관련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차원의 협의를 요청했다.
에스토니아 외교부는 19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러시아의 MiG-31 전투기 3대가 핀란드만 상공을 통해 자국 영공에 무단 진입해 총 12분간 머물렀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이를 "대담한 도발 행위"라고 규정하며 강력히 규탄했다.
나토 측은 러시아군의 침범 직후 즉각 대응에 나섰다고 밝혔다. 나토 대변인은 "군사 동맹이 즉시 대응해 러시아 전투기를 요격했다"며 "이는 무책임한 러시아의 행태가 또다시 반복된 사례이자, 나토의 신속 대응 능력을 보여주는 예"라고 강조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이탈리아, 핀란드, 스웨덴 등은 나토 임무에 따라 전투기를 긴급 출격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에스토니아 영공을 침범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관련 전투기들이 "계획된 비행을 수행 중이었으며, 국제 영공 규정을 철저히 준수했으며, 타국 국경을 침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객관적인 감시 결과에 따라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국방부는 해당 전투기들이 에스토니아령인 바인들로섬에서 3km 이상 떨어진 발트해 중립 수역 상공을 비행했다고 밝혔다.
러시아의 2022년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이후, 나토와 러시아 간 군사적 긴장은 계속 고조돼 왔다.
최근 들어 양측 간 긴장은 더욱 격화되고 있다. 지난주 폴란드와 루마니아 등 나토 회원국들이 자국 영공에 러시아 드론이 침입했다고 밝히면서다.
이에 나토는 동부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전투기를 포함한 군사 자산을 동쪽으로 재배치하겠다고 밝혔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이날 긴급 회의를 열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조약 제4조에 따른 회원국 간 협의를 요청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크리스텐 미할 에스토니아 국방장관은 회의 직후 "나토는 모든 도발에 단호하고 일치된 대응을 해야 한다"며 "공동의 상황 인식과 향후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동맹국들과 협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나토 조약 제4조는 회원국 중 한 곳이 영토 보전이나 안보 위협을 인지할 경우, 전체 32개 회원국 간의 긴급 협의를 공식 개시하는 조항이다. 미국과 다수 유럽 국가들이 공동 방어 체계로 묶여 있는 조항이기도 하다.
이번 제4조 협의 요청은 최근 일주일 사이 두 번째다. 앞서 폴란드도 러시아 드론이 자국 영공에 진입한 후 해당 조항 발동을 요구한 바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9일 오후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큰 문제로 번질 수 있다"며 "추후 관련 보고를 받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에스토니아 외교부는 이날 러시아 대리대사를 초치해 항의의 뜻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카야 칼라스 유럽연합(EU) 외교정책 대표도 이번 침범을 "매우 위험한 도발"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올해 들어 러시아가 자국 영공을 네 차례 침범했다고 덧붙였다. 에스토니아는 동쪽으로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정부에 따르면, 해당 전투기들은 북동쪽에서 핀란드만 상공을 통해 진입했으며, 이후 핀란드 전투기에 의해 요격됐다. 에스토니아 영공에 진입한 후에는 에스토니아에 주둔 중인 이탈리아 공군의 F-35 전투기가 나토 발트해 영공 감시 임무에 따라 출격해 러시아 전투기를 호위하며 영공 밖으로 내보냈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러시아 전투기들이 비행계획을 제출하지 않았고, 항공기 위치 확인을 위한 트랜스폰더도 꺼져 있었으며, 에스토니아 항공관제소와의 양방향 교신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한노 페브쿠르 에스토니아 국방장관은 BBC 인터뷰에서 "러시아군이 자국 영공에 12분간 머문 것은 전례 없는 일"이라며 "이런 상황에서는 그들을 에스토니아 영공에서 밀어내는 것이 유일하게 옳은 조치"라고 말했다.
미할 장관은 이번 침범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러시아의 의도는 나토 회원국들이 자국 방어에 집중하도록 유도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적 관심과 지원을 분산시키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이자 에스토니아 출신인 칼라스 대표는 SNS(엑스)를 통해 "EU는 회원국들이 방어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유럽 차원의 자원을 계속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서방의 의지를 시험하고 있다. 우리는 약함을 보여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도 엑스를 통해 "모든 도발에는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며, 동부 전선을 강화하는 데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는 "위협이 고조되는 만큼, 우리의 압박도 함께 높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스벤 사코프 주영 에스토니아 대사는 BBC에 "이번 사태를 계기로 나토 동부 영공 방어를 강화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우리가 지금과 같은 상황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면 매우 우려스러웠을 것"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토니아는 자국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갖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주 폴란드군은 러시아 드론 최소 3대를 격추했다고 밝혔다.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총 19대의 드론이 폴란드 영공에 진입한 것으로 기록됐다"고 전했다.
러시아는 이번 침입이 의도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폴란드 영토 내 시설을 목표로 삼을 계획은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러시아의 우방국인 벨라루스는 드론이 폴란드 영공에 진입한 것은 "항법장치가 전파 교란을 받아 경로를 이탈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며칠 뒤 루마니아 국방부는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을 정찰 중이던 루마니아 F-16 전투기 두 대가 러시아 드론을 포착했다고 밝혔다. 당시 러시아는 도나우강 유역의 우크라이나 기반시설에 공습을 가하고 있었다. 드론은 이후 레이더에서 사라졌다고 국방부는 전했다. 러시아는 이에 대한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폴란드와 루마니아에 대한 러시아의 잇단 침공에 대응해, 나토는 병력과 전투기를 동부로 추가 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영국, 프랑스, 독일, 덴마크 소속 항공기들이 폴란드 상공에서 공중방어 임무를 수행 중이며, 이는 동부 전선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다.
에스토니아의 페브쿠르 국방장관은 "나토는 동부 전선에 더 집중해야 한다"며 "에스토니아는 일종의 '공동 대응선'이자, 나토의 현관문을 닫아두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15일에는 러시아 드론의 추가 침입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프랑스 전투기 한 대가 긴급 출격했다. 나토는 해당 경보는 곧 해제됐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