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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카메라에 담긴 1950년 12월, 평양이 함락하던 순간

4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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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 Images

1950년 12월, 평양이 함락되던 한국전쟁(6·25 전쟁)의 결정적 순간을 BBC 카메라맨이 포착했다. BBC 인히스토리(In History)는 한국전쟁이 어떻게 국토와 국민을 황폐화시키고, 한반도의 미래를 정하고, 세계를 핵 재앙 직전으로 몰아넣었는지 살펴본다.

1950년 12월 5일, BBC는 불타는 평양을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방송했고, "평양 밖으로 나가는 모든 길이 난민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목적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는 BBC 카메라맨 시릴 페이지가 평양을 떠나기 전 촬영한 영상이 사용됐다. 중국군이 온다는 소식에 혼란과 공포가 들어차고 있었다. 점령 중이던 유엔군의 철수 소식도 들려오자, 페이지는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겨울의 혹한 속에서 건물이 불타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페이지는 겁에 질린 사람들이 잡히는 대로 손에 들고 피난하는 모습을 촬영했다.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대피하는 모습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의 우위가 뒤집히던 극적인 반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불과 몇 주 전, 맥아더 장군은 해리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을 통일할 준비가 됐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평양이 함락되고 북한을 향한 군사 공세가 완전히 무너지자, 맥아더는 전면적인 핵전쟁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의 혼란과 유혈 사태는 6개월 전부터 시작됐다. 한반도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잔혹한 일제 강점에 신음하고 있었다. 미국은 전시 동맹국이었던 소련에 일본이 항복하면 일시적으로 한반도를 나눠 통치하기로 제안했다.

일본군 철수를 수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1945년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은 38선이라는 임의의 경계선을 따라 한반도를 둘로 나눴다. 소련은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김일성을 지원했고, 미국은 남쪽의 대한민국에서 이승만을 지원했다.

새로 탄생한 두 정부는 처음부터 상대 정부의 정통성이나 분계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런던대학교 SOAS 한국학 센터의 오웬 밀러 박사는 2024년 BBC 히스토리 매거진 팟캐스트에서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상대 정부의 정당성이나 의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양측 지도자 모두 무력 통일을 원했다. 1949년, 미국과 소련은 한국에서 점령군 대부분을 철수했지만, 끓어오르는 긴장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사실상의 국경선이 된 38선을 따라 피비린내 나는 충돌이 멈추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공산주의 지도자 김일성이 움직였다. 이른 새벽, 잘 훈련된 전투 병력을 이끌고 38선을 넘어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북한군은 순식간에 남한 군대를 압도했다. 북한군은 며칠 만에 남한의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에 충성을 맹세하거나 투옥 또는 처형당하는 선택지를 강요 받았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의 공격 속도와 성공에 당혹했다. 트루먼은 한 나라가 공산주의에 함락되면 다른 나라들도 뒤따를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을 믿었고, 새로 구성된 유엔(UN)에 남한을 방어해 달라고 호소했다. 소련은 이 투표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보이콧하고 있었다. 그 결과, 1950년 6월 28일 모든 유엔 회원국에 북한군 격퇴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됐다. 2차 세계대전 말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유엔 연합군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전세를 뒤집다

미국은 가장 먼저 대응해 일본에 주둔 중이던 군대를 급파했다. 하지만, 미군은 한반도를 빠르게 휩쓸고 내려와 우위에 있던 북한군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밀려났다. 전투가 격화되면서 충돌에 휘말린 수천 명의 민간인이 숨졌다. 9월이 되자 한국군과 유엔군은 남쪽 끝 부산항 주변의 작은 거점만을 남기고 벼랑 끝으로 밀려났다. 북한이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둔 것처럼 보였다.

맥아더 장군은 리스크를 안고 도박을 했다. 북한군 전선 깊숙이 위치한 인천항에 해상 공격을 시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은 집중 포격을 받으며 상륙해 인천항을 점령한 뒤 서울 탈환을 위해 빠르게 이동했다.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한 뒤, 이전 점령군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수만 명의 사람들이 협력자라는 이유로 남한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이는 한국전쟁 동안 벌어진 무차별적이고 끔찍한 민간인 대량 학살 중 하나였다. 밀러 박사는 "전쟁 중에 많은 학살이 자행됐다. 최전선이 아니라,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충성이 의심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학살했다"고 말했다.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의 보급선 및 통신 차단을 성공시켰고 유엔군은 부산을 탈출해 치열한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이로써 전세는 역전됐고,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엔 결의안을 통과시킨 맥아더는 공산군을 완전히 격멸하기로 결심했고 38선을 넘어 북한군을 추격하도록 명령했다. 1950년 10월 19일,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중국 국경의 압록강을 향해 진격 중이었다. 몇 달 전만 해도 남한이 위태로워 보였던 전황이 완전히 역전된 듯했다.

트루먼은 중국뿐 아니라 이 무렵 원자폭탄을 개발한 러시아까지 끌어들일 경우 또 다른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것을 염려해 전쟁 격화를 주저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친서방 성향의 남한 지도부와 함께 한반도를 다시 통일할 수 있는 빠르고 확고한 승리가 눈앞에 있다고 확신했다.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빠른 진격은 국경 너머에 있던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오쩌둥은 적대적인 서방의 군사력이 중국 문턱에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했고, 중국 군대에 비밀리에 국경에 모여 맥아더의 진격에 맞서도록 명령했다. 11월 말, 중국이 한국전쟁의 전황을 다시 한번 갑작스럽게 뒤집어 놓은 것이다.

수천 명의 중국군이 유엔군을 향해 일련의 파괴적 공격을 가했다. 맥아더의 군세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겨울철 혹한에도 시달리면서 불과 몇 주 전에 점령했던 넓은 영토에서 물러나야 했다. 중국군은 청천강 전투에서 유엔군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 미 해군은 부대 역사상 가장 대대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후퇴를 경험해야 했다.

핵 위협

중국의 공격이 기세를 올리는 가운데, 두 달 전 유엔군에 점령당했던 평양 시민들은 다시 폭풍의 중심에 서게 됐다. 중국의 가차 없는 진격을 멈추지 못한 맥아더는 평양 포기를 결정했다. 유엔군은 철수 준비를 시작했다. 다가오는 중국군에 도움이 될 만한 모든 보급품과 장비를 불태우도록 명령받았다. 평양의 수많은 건물이 화염에 휩싸였다. 북한군과 중국군이 유엔군을 도왔다고 의심되는 사람을 숙청하겠다고 위협하자, 겁에 질리고 지친 수천 명의 평양 시민이 도시를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자칫 발이 묶이지 않도록 군대가 떠날 때 필사적으로 대동강을 건넜다. 페이지는 영하의 날씨에 영국군의 감시를 받으며 이들의 모습을 촬영했다. BBC는 "군용 차량의 이동이 우선이기 때문에 피난민들은 평양 남쪽의 대동강 다리를 건널 수 없었다"고 보도했다.

미군 공병대는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마지막 군용 차량이 다리를 건너면 다리가 폭파되도록 장치를 설치했다. 보도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도시에 남겨질 것이 두려웠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강가로 향했습니다. 강변에서는 온갖 종류의 선박이 사람을 실어 나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페이지 본인도 해가 지기 전에 비행장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페이지가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비행장 대부분이 불타고 있었다. 유엔군은 북한군이 사용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물자를 파괴하느라 분주했다. BBC는 "어둠이 내리자 불타는 격납고와 작업장이 밤하늘을 밝혔다"며, "자정 무렵에는 비행장 근처 수백 채의 민가도 화염에 휩싸였다"고 보도했다.

페이지는 비행기에서 마지막으로 평양을 촬영했다. 한때 맥아더의 승리를 상징했던 평양이, 이제는 맥아더의 전략 실패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BBC는 "카메라맨이 평양 비행장을 떠났을 때는 새벽이 가까웠다"며 "카메라맨은 거의 마지막으로 이륙한 비행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유엔군이 후퇴하는 모습이 보였다. 남쪽으로 향하는 도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차량 행렬로 인해 먼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고 보도했다.

한국 전황이 급격히 악화되는 가운데, 트루먼과 맥아더는 전쟁 수행을 두고 계속 충돌했다

1950년 12월 6일, 중국군과 북한군이 평양에 다시 진입하면서 미국의 종전 전략은 훨씬 더 위험한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트루먼은 항상 맥아더와 불편한 사이였다. 맥아더 장군이 대통령의 권한을 침범하고 명령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한반도 전황이 급격히 악화되는 가운데, 트루먼과 맥아더는 전쟁 수행을 두고 계속 충돌했다.

맥아더는 마오쩌둥 개입에 대한 트루먼의 우려를 과소평가했고, 이제는 공개적으로 전쟁 확대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공산군이 한반도에서 무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미국이 핵무기을 내세워 위협하고 중국 본토를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아더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미 전략공군사령부 수장이었던 커티스 르메이 사령관도 선제공격을 지지했다. 핵전쟁을 동경했던 르메이는 이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핵미사일 기지 폭격을 허용해야 한다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설득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핵무기 사용 주장은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총리를 비롯해 한국전쟁에 휘말린 다른 유엔 회원국을 크게 놀라게 했다. 애틀리 총리는 워싱턴 DC로 날아가 반대 의사를 밝힐 정도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계획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미국이 중국을 공격해도 러시아가 겁을 먹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다시 원점으로'

1950년 12월 9일, 맥아더는 핵무기 사용 재량권을 공식 요청했다. 트루먼은 요청을 반려했다. 2주 후, 맥아더는 중국 본토를 포함하는 공격 대상 목록을 제출하고 필요한 원자폭탄 수량을 나열했다. 맥아더는 필요에 따라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사령관에게 재량권을 부여해 달라고 국방부에 계속 요구했다. 1950년 12월 말, 유엔군은 38선 밖으로 밀려났다. 1951년 1월 중국군과 북한군은 폭격으로 파괴되고 사면초가에 몰렸던 서울을 탈환했다.

밀러 박사는 "대통령이 르메이와 맥아더 같이 핵무기 사용을 원한 사령관들의 의견에 귀를 더 기울였다면 핵무기를 사용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사령관들은 '사용도 안 할 핵무기를 보유해서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했습니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통제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맥아더의 공격적인 태도가 3차 세계대전을 촉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자, 트루먼은 1951년 4월 불복종을 이유로 맥아더를 해임했다.

한국전쟁은 2년 더 이어졌다. 서울을 손에 넣은 진영이 네 번 바뀌었다.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피비린내 나는 장기 소모전이 이어졌다.

밀러 박사는 "한국전쟁 최대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1951년 봄 두 진영의 최전선이 당초 분단선이었던 38선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과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지만,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은 1953년 휴전으로 전쟁을 끝냈지만 평화협정(종전협정)은 체결하지 않았다. 즉, 엄밀히 말하면 양국은 여전히 전쟁 중이다. 이 충돌은 한반도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다양한 추정치가 있지만, 한국전쟁 동안 약 400만 명이 사망했고 이 중 절반은 민간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잃거나 기아에 시달렸다. 공중 융단 폭격으로 전국이 황폐해졌고, 온 마을과 도시가 파괴됐다. 분단으로 생이별한 가족들은 다시 함께할 수 없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두 나라는 얼어붙은 갈등에 붙잡혀 있다. 둘을 갈라놓은 250km 길이의 비무장 지대는 군인 수백 명의 경계 속에서 지뢰로 덮여 있다. 끝나지 않은 전쟁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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