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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되풀이할 셈인가요' … 계엄령 사태가 불러일으킨 트라우마

2024.12.10
고재학 씨
BBC
고재학 씨는 계엄령이 일상이었던 시절을 기억한다

고재학 씨는 군인들이 젊은 여성들을 향해 비정하게 총을 쏘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1960년 4월이었다. 당시 학생들은 독재자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정부 청사에서 일하고 있던 고 씨는 창문 밖으로 시위대와 경찰 간 충돌 장면을 목격했다.

현재 87세인 고 씨는 "당시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이) 선두에서 있었다 … 그대 총이 발사됐다"고 기억했다. 그리고 며칠 뒤, 계엄령이 선포됐다.

한국은 아시아 내 평화로운 민주주의의 등대 같은 국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독재자가 집권했던 건국 후 첫 40년간 무려 16차례 계엄령이 선포됐다.

그렇기에 한국인들에게 민주주의란 어렵게 얻어낸 매우 귀중한 권리이다. 그렇기에 이번 주 윤석열 대통령이 45년 만에 다시 계엄령을 발표하자 국민들은 이토록 본능적으로 강렬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거의 즉시 국회의원들은 계엄령을 뒤집고자 집에서 뛰쳐나와 국회로 달려갔고, 일부는 담장을 넘기도 했다.

그리고 일반 시민 수백 명이 일제히 국회 앞으로 모여들어 의원들을 내쫓으라는 명령을 들은 군인들의 앞을 막아섰다.

게다가 일부 군인들 또한 군중 해산 및 국회 진입 시 그리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분명 명령을 이행할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지난 3일 밤,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종북 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이에 실제로 북한 관련 위협 상황이 발생했다고 믿은 일부 국민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TV로 윤 대통령의 긴급 대국민담화를 지켜보던 많은 이들이 이내 의문을 표하게 됐다. 그러한 종북 세력이 존재한다는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대체 누구인지도 설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과거 윤 대통령은 자신의 개혁을 방해하는 야당을 향해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 적도 있기에 이내 국민들은 그가 정적을 무너뜨리고자 계엄을 선포하게 됐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한국에는 이전에도 국가를 안정시키고 사회를 전복하고자 북한이 심어놓은 공산주의 세력을 제거한다면서 지도자들이 계엄 선포를 정당화한 역사가 있다.

계엄령과 함께 시민들의 이동권 및 표현의 자유는 제한당했다. 야간 통행금지 및 체포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때때로 시위대와 당국 간 폭력적인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은 19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 시위대를 진압하고자 계엄령을 연장했고, 이에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계엄군은 잔혹하게 시민들을 진압했고, 이후 이는 학살로 불린다. 공식 사망자 수는 193명이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수백 명은 더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시민들이 체포되는 모습
Getty Images
1980년 시위하던 시민들이 체포되는 모습. 이러한 사건은 한국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렇게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점차 거세지면서 1988년 한국 정부는 처음으로 자유롭고 공정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게 됐고,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로 변모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기 수십 년간의 역사는 여전히 한국인들의 의식 형성에 깊고 영원한 흔적을 남겼다.

환경운동가인 켈리 김(53세)은 "한국인 대부분이 계엄에 대해 트라우마, 그것도 아주 깊은 트라우마를 지닌다"면서 "우리는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길 원치 않는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마지막 계엄령 당시 어린아이였기에 거의 기억나는 게 없다. 그러나 계엄령이 부활할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몸이 떨린다.

"(계엄령이 부활한다면) 정부는 모든 언론과 시민들의 일상을 통제할 것입니다. 저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기에 정부 비판 등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이 불가능해질 테죠.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한편 민주주의를 통해 얻은 자유는 단순히 시민 사회의 발달로만 이어진 게 아니다.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가 치러진 이후 3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드라마, TV쇼, 음악, 문학 등 한국의 창작 분야는 크게 번성해 이제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창조 산업은 과거사에 다시 눈을 돌려 재조명했고, 이에 따라 청년들이 기억할 수 없는 역사는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일례로 한국에서는 과거 독재 정권 시절을 다룬 작품들이 늘어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과 같은 사건들이 대중문화를 통해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지난해에는 시대극 '서울의 봄'과 같이 인기배우 황정민 등 유명 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블록버스터 영화도 나왔다. 해당 영화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벌어진 정치적 혼란을 그리고 있다.

웹 디자이너인 마리나 강(37)은 "(윤 대통령이 계엄 선포하는) 모습을 보며 그 영화가 떠올랐다 … 과연 그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국에는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 시대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작품이 많습니다. 비록 이러한 창작물을 통해 그 끔찍했던 과거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는 하나, 그래도 그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느낌을 강하게 느낍니다."

윤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
BBC / TESSA WONG
이번 주 내내 윤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여러 청년들은 과거가 되풀이할 수 있다는 불신감을 느낀다. 비록 계엄 통치하에 살아본 적은 없으나, 부모와 친지들로부터 이에 대한 공포감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권후(15)는 "처음 (윤 대통령의 발표를 들었을 때는) 그저 내일 학교에 안 가도 된다는 생각에 들떴다"면서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일상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는 계엄령이 내려지면 일이 있어도 늦게까지 밖에 나가 있을 수 없을 것이라며 걱정하셨고 … 야간 통행금지령이 다시 내려질 수도 있다는 소식에 뉴스를 보시며 욕설을 내뱉으셨습니다."

한편 모든 한국인이 과거사에 대해 이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의 메이슨 리치 교수는 "대다수의 한국인은 민주주의를 무척 소중히 여기며, 6.25 전쟁 이후 권위주의 시절을 후회하고 있다"며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도 "현재 한국은 과거 권위주의 시절 여러 면모, 특히 공산주의적인 국가 전복을 막기 위한 특정 억압 조치는 얼마나 정당한지 등의 주제에 대해 매우 분열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고재학(왼쪽), 강효산(오른쪽) 씨
BBC / TESSA WONG
고재학(왼쪽), 강효산(오른쪽) 씨는 계엄령이 일상이었던 시절을 기억한다

국민 중에는 특히 고령층을 중심으로 과거에는 사회 안정과 민주주의를 위해 계엄령이 필요했다고 보는 이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올해 83세인 강효산 씨는 "당시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적 사회주의 간 이념 전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시기였다"며 말을 꺼냈다. 강 씨는 친구 고 씨와 함께 서울의 중심이자 시위 집회의 중심지인 광화문 근처 한 카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념 간 경쟁적 대립이 충돌로 이어졌고, "군이 개입해 상황이 안정됐고 … 질서를 회복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정착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강 씨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긍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면서 계엄령이 선포될 때마다 한국은 "유리한" 자리에 놓이게 됐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계엄령은 "그저 사람들을 죽이거나 무분별한 폭력이 벌어진" 다른 나라와 달리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다르다. 두 80대 어르신 모두 윤 대통령의 이번 계엄령 선포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입을 모았다.

고 씨는 "우리는 살아오면서 여러 차례 계엄령을 경험했으나, 이번 것은 그 명분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환경운동가인 김 씨 또한 윤 대통령의 계엄령이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민주주의가 승리해 다행이라 여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투쟁해 얻어낸 것이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다시 잃고 싶지 않습니다."

"민주주의와 일상의 자유가 없다면 대체 삶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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