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세라핌: 멤버간 문제도, 대중의 비난도 음악으로 풀어내는 '피어리스'한 아이돌
팝 음악계의 무덤이 있다면, 멤버 간 사이가 틀어지고 무너지고 그렇게 결국 각자의 길을 택하며 해체한 그룹이 수없이 묻혀 있을 것이다.
영국의 보이그룹 '파이브' 는 무대 뒤에서 시작된 말다툼이 결국 주먹다짐으로 번지며 해체했다. 그룹 '올 세인츠' 멤버들은 바지 한 벌을 두고 거친 말다툼을 벌인 끝에 각자의 길을 갔다. '오아시스'는 형 노엘 갤러거가 동생 리암에게 자두를 던지자, 리암이 기타를 휘두르며 공격하는 사태를 계기로 무려 16년간 함께 활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주한 문제에 대한 해결을 이야기하는 그룹은 정말 드물다. 그래서 나는 K팝 걸그룹 르세라핌의 최신 앨범에 매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정규 2집 ''PUREFLOW' pt.1' 중 '우리 어떻게 더 사귈 수 있을까'라는 곡은 미국 뉴욕 출신 멤버 허윤진과 동료 멤버 김채원 간 마찰의 역사를 상세하게 담아낸다.
이들은 구슬픈 기타 선율 위에서 "Is friendship all just for show?(우정은 다 겉치레일 뿐인가?) …I need your company(네가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No matter how you hurt me(네가 나를 얼마나 아프게 해도 말이야)"라고 노래한다.
서울에 있는 르세라핌 소속사 사무실과 연결한 전화 인터뷰에서 윤진은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지만, 이를 인정하기란 물리적으로 쉽지 않은 그런 이상하고도 복잡한 감정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가끔 우리 자신의 감정을 의심할 때가 있잖아요. '아, 이렇게 가까워지고 싶은 건 나뿐인가? 상대방은 이 관계에 그렇게까지 진심이 아닌 건가?' 하면서요."
목 부상으로 인해 인터뷰에 참석하지 못한 채원은 이 곡에 담긴 불안감은 개인적인 반목보다는 소통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채원은 한국의 토크쇼 '리무진 서비스'에서 "가사를 보면 불화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다 다르지 않냐"면서 "그런 차이점에 맞추어가는 시간이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윤진 또한 "가끔은 '네가 날 아프게 해'라는 말이 너무 모질게 느껴질 수도 있다"면서 "하지만 우리 관계를 소중히 여기기에 이 모든 상황이 나아지길 바란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채원에 따르면 "서로에게 힘들었던 점이나 … 그런 것들을 솔직하게 함께 대화하면서 풀어가던 시기가" 있었고, "그러면서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고 한다.
실제로 두 사람은 정말 가까워져서 중국 마카오 타워에서 233m 높이의 번지점프대에서도 함께 뛰어내릴 정도다.
오아시스의 노엘과 리암도 한 번쯤은 함께 번지점프를 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관계의 중대한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성숙함은 매우 귀하다.그런데 이는 진지한 자기 성찰과 유쾌한 엉뚱함을 섞는 르세라핌식 K팝의 특징이기도 하다.
윤진, 채원에 더해 미야와키 사쿠라, 나카무라 카즈하, 홍은채까지 총 5인조로 구성된 르세라핌은 지난 2022년 데뷔해 'Antifragile(안티프레자일)'과 'Unforgiven(언포기븐)' 같은 세련되고 베이스가 강조된 댄스곡을 선보였다.
그룹명 르세라핌은 'I'm Fearless(나는 두려움이 없다)'라는 문구를 재배열한 애너그램으로, 실제로 이들이 초기에 공개한 곡들은 무한한 자신감을 내세우는 당당한 걸그룹의 전형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의 결의는 곧 시험대에 올랐다. 라이브 실력부터 외모, 심지어 가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겨냥한 악의적인 온라인 혐오 공세가 이어졌다.
2024년 공개된 다큐멘터리는 당시 다섯 멤버에게 이런 반응들이 미친 영향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이전 소속 그룹인 HKT48과 IZ*ONE(아이즈원) 시절에는 이처럼 악의적인 비난을 받아본 적 없는 베테랑 팝 가수 사쿠라는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 왜 고통받고 울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흐느낀다.
하지만 르세라핌은 이러한 역경을 딛고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인기를 누리는 팝 그룹 중 하나로 성장했다. 미국에서 앨범 5장이 차트 톱 10에 진입했고, 스포티파이 글로벌 차트에는 3만3000회 이상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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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츠아이의 멘토들
르세라핌이 성장하면서 그들의 음악은 더욱 톡톡 튀고 대담해졌다.
2024년 발매한 곡 'Crazy(크레이지)'의 하우스 비트는 뉴욕의 볼룸 문화를 반영했으며, 2025년 발매된 'Come Over(컴 오버)'는 영국 댄스 그룹 '정글'이 프로듀싱을 맡았다.
르세라핌의 팬을 자처하는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핑크 팬서 리스'는 코첼라 공연 중 'Crazy'를 연주하기도 했다.
핑크 팬서 리스는 과거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 곡은 시대를 앞서간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같은 소속사 후배 그룹인 캣츠아이는 자신들이 인터넷 악플을 대처하는 과정에서 르세라핌 멤버들이 힘이 돼 주었다고 말한다.
캣츠아이의 멤버 소피아는 "윤진과는 거의 매일 대화한다"고 했다.
라라 역시 "우리를 이해해 줄 사람이 있다면, 바로 르세라핌 선배들일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마주하는 수업이 필요하다면 르세라핌의 곡 'SPAGHETTI(스파게티)'를 들어보길 권한다.
지난 10월에 발매된 이 싱글에서 멤버들은 안티팬들을 '맛있게' 받아치며, '우리가 그렇게 싫다면, 왜 그렇게까지 우리에게 집착하는 거냐'고 되묻는다.
비꼬는 듯한 자신감이 넘쳐 흐르는 이 곡에는 중독성 강한 훅이 연이어 쏟아질 뿐만 아니라, BTS의 제이홉의 피처링도 더해졌다.
엄청난 화제를 모으며 히트한 이 곡은 윤진에게도 "전환점"이 됐다고 한다.
"우리가 얼마나 긍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들인지 깨닫게 됐어요."
"알고 보니 우리에게는 즐기는 모습이 정말 잘 어울리더라고요."
"덕분에 우리가 음악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방향을 잡을 수 있었고, 그렇게 '스파게티'가 탄생했습니다."
이 곡은 레세라핌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연습을 빠지려던 부질없는 시도나, '아기' 막내 은채를 끊임없이 놀리거나, 카즈하가 말 의상을 입고 콘서트를 기다리는 팬들에게 몰래 다가가는 모습 등, 멤버들은 언제나 무대 밖에서 유쾌한 모습을 보여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 유머를 음악에 녹여내고 있다.
일례로 이번 앨범 수록곡 중 시끌벅적한 분위기의 포시 랩(여러 래퍼들이 각자의 벌스를 이어 부르는 곡) 'Saki(사키)'에서는 사쿠라의 또 다른 자아를 내세워 그룹을 둘러싼 여러 악의적인 소문을 풍자한다.
윤진 또한 "일종의 풍자"라고 설명했다.
"다들 '사키가 대체 누구야?'라며 궁금해 합니다. 왜 다들 사키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걸까요? 사키는 금수저일까요? 제가 듣기로는 세상에서 가장 무례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아니, 누가 들었는데 파티가 끝나면 술도 안 마시고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는 사람이라던데요."
그럼 진실은 무엇일까.
사쿠라는 웃으며 "사실 사키는 파티에 절대 가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굉장히 내성적이죠. 집에 머물며 소소한 취미를 즐깁니다. 뜨개질이나 코바느질을 해요."
그리고 이러한 취미 활동은 가끔 활동이 버겁게 느껴질 때마다 멤버들이 정신적 평온함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쿠라는 "그냥 '르세라핌의 사쿠라'로만 존재하는 것은 좀 두렵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다양한 취미 활동을 하고자 노력합니다. 르세라핌의 사쿠라로서 힘든 시기를 겪더라도, 코바늘이나 뜨개질 세계에 빠져들면 그런 두려움은 어느새 사라지거든요."
하지만 막상 중대한 순간이 오면, 다섯 멤버는 마치 사쿠라의 뜨개질 머리 스카프만큼이나 촘촘하게 뭉친다.
그리고 이번 앨범은 이러한 연대의 이야기를 담았다.
녹음에 들어가기 전, 윤진(수록곡 다수에 공동 작곡가로 참여했다)은 멤버들에게 그들의 감정에 관해 물었다.
카즈하는 "윤진이는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라며 "우리는 같은 일을 겪으며 다양한 감정을 함께 나눴어요. 그리고 윤진이가 이 모든 경험을 우리를 위한 노래로 만들어줘서, 그래서 우리가 그 가사를 통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줘서 정말 의미가 커요"라고 말했다.
윤진 또한 "전반적으로 우리 모두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 자매애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더 강인해질 수 있었는지, 그래서 어떻게 다시 꿈꾸고 달릴 수 있게 됐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선공개 곡 'Celebration(셀러브레이션)'은 그 에너지를 댄스로 풀어내는 동시에, 르세라핌이 정의하는 Fearless(두려움이 없음)의 의미를 새롭게 써 내려간다.
사쿠라는 "처음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아예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강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Fearless 2.0' 시대의 우리는 두려움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르세라핌의 가장 두려움 없는 행보는 타이틀곡 'BOOMPALA(붐팔라)'에 1990년대 히트곡인 'Macarena(마카레나)'를 샘플링한 결정일 것이다.
성공하기 어려운 조합처럼 보인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훌륭하게 잘 어울린다. 마카레나의 경쾌한 후렴구를 강렬한 라틴 하우스 비트에 실어, "You can't hold on to the clouds in the air(하늘의 구름을 붙잡을 순 없어)"라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아냈다.
그렇게 이 곡은 또 하나의 히트곡이 돼가는 중이다. 특히 모든 멤버가 명상하던 도중 채원이 슬그머니 눈을 떠 춤을 추는 듯한 인트로 안무는 틱톡에서 이미 입소문을 타고 있다. 그 화력에 힘입어, 이들은 지난주에만 전 세계적으로 50만 장이 넘는 앨범을 판매했다.
르세라핌을 꾸준히 응원해 온 팬들이라면 멤버들이 한층 새롭고 더 행복한 단계로 접어드는 모습에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지지에 보답하고자 멤버들은 오는 7월, 2번째 월드 투어에 나선다. 영국 런던에서는 10월 16일 첫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은채는 이번 투어에서는 지난해 '이지크레이지핫(EasyCrazyHot)' 투어의 파티 분위기를 한층 더 발전시킬 예정이라고 말한다.
"지난 투어 중에도 '다음에는 이런 퍼포먼스나 저런 무대 연출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계속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아이디어가 추가됐습니다. 시각과 청각을 모두 만족시키는 축제가 될 것 같아요."
이에 더해 '피어나(르세라핌 팬들을 부르는 애칭)'들은 올해 12월 투어가 마무리되기 전, 더 많은 신곡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윤진은 "이번 앨범명이 'PUREFLOW' pt.1'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이어질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이 오지 않냐"며 살며시 귀띔했다.
무척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