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의 위기? 월드컵 탈락 후폭풍, 왜 이렇게 거세나
"한국 축구는 죽었다."
지난 30일 이른 새벽, 수백 명의 축구팬들과 취재진이 인천국제공항에 모여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안고 귀국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을 향해 분노를 표했다.
공항에 모인 사람들은 '한국 축구는 죽었다', '축협(대한축구협회) 완전 해체' 등이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었고, 북을 치며 "홍명보 나가!"를 외치기도 했다.
축구팬들의 분노는 선수들을 향하지는 않았다. 물론 월드컵 기간 동안 기대 이하의 경기력으로 비판받은 일부 선수들도 있었지만, 공항에서는 감독 뒤를 따라 걸어 나오던 선수들에게 환호와 박수를 보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특히 이튿날 새벽 주장 손흥민이 귀국할 때는 "고생하셨어요", "고개 숙이지 마세요" 등의 격려가 쏟아졌다.
올해 한국은 조별리그 A조 그룹 경기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멕시코에 패하며 32강 진출에 실패했다. 많은 축구팬들은 전통적인 강호가 없는 조 편성에 손흥민, 이강인, 김민재 등 유럽 주요 리그에서 활약하는 정상급 선수들을 보유한 대표팀의 수준을 고려하면, 이번 결과가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고 보고 있다.
월드컵에서는 전통적인 강호가 패하는 등의 이변이 적지 않다. 이번 월드컵의 경우 역대 최대인 48개국이 참가하고 이에 맞춰 진행 방식도 변경됐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한국 축구팬들은 왜 유독 이번 결과에 분노하고, 정치권까지도 '축협 개혁'을 외치고 있는 걸까.
축협은 왜 다시 홍명보를 선임했나
사실 홍 감독은 일찌감치 2026 월드컵을 맡을 사령탑으로 선임된 것은 아니다.
전임 감독인 위르겐 클린스만이 2023 AFC 아시안컵 준결승 요르단에 패하며 우승에 실패한 뒤 이후 부임 1년도 채 되지 않아 경질됐고, 2026 월드컵을 준비할 새로운 감독이 필요해졌다.
축협은 내부 규정에 따라 전력강화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새 감독을 선임해야 했다. 캐나다 대표팀 감독인 제시 마시를 포함한 여러 유명 지도자가 후보군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협회가 많은 논란 끝에 선택한 건 홍명보 감독이었다.
홍 감독은 4강 신화를 이뤄낸 2002 한일 월드컵 대표팀 주장으로,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서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과 K-리그 울산 현대의 우승 등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뤄냈다. 하지만 가장 많은 관심이 집중되는 월드컵에서는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홍명보는 2014 브라질 월드컵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됐지만, 그해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당시 알제리에 2대 4로 패배한 경기는 많은 팬들에게 한국 축구 역사상 최악의 월드컵 경기 중 하나로 기억됐다.
그렇다면 왜 다시 홍 감독이었을까. 일부 팬들과 비평가들은 정몽규 회장을 비롯한 협회 고위 관계자들이 능력보다 학연 등의 개인적 인맥을 우선시해 홍 감독을 선임했다고 비판했다.
대표팀 감독 선임을 둘러싼 논란은 전 축구 국가대표 박주호의 폭로로 더욱 커졌다. 당시 전력강화위원회 위원이었던 박 씨는 2024년 7월 8일 공개한 유튜브 영상을 통해 홍 감독 선임이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위원으로 일한 5개월이 너무 허무하다며 "절차 안에서 이뤄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축구협회는 박주호가 개인적 견해를 바탕으로 왜곡된 설명을 하고 있다고 반박했고, 법적 대응까지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많은 팬들과 축구계 인사들의 공감을 얻었다. 2002 월드컵 주역이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한 박지성도 있었다.
박지성은 박주호의 폭로 후 며칠 뒤 SBS 등 취재진과 만나 감독 선임 논란에 관해 "체계 자체가 완전히 무너져 있지 않나...절차대로 감독을 선임해야겠다는 약속 자체가 무너졌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나부터 다시 쌓아나가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결국 문화체육관광부는 조사에 나섰고, 같은 해 11월 홍명보 감독과 클린스만 감독 선임 과정이 공정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는 내용의 최종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발표 내용에 따르면, 축협은 "규정상 권한이 없는 기술총괄이사가 불공정하고 불투명한 방법으로 면접을 실시"하고 홍 감독을 "최종 감독으로 내정·발표한 후에 이사회에 서면으로 의결을 요구하는 등 형식적으로 이사회를 운영"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체부는 정몽규 회장을 포함한 협회 고위 관계자 3명에 대한 징계와, 필요할 경우 감독 선임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진행하는 등 문제를 시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축협은 문체부 감사 결과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하고 집행정지를 신청했고, 법원이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하면서 정 회장은 지난해 2월 4선 연임에 성공했다.
축협은 행정소송에서는 지난해 4월 1심에서 패했지만, 항소하기로 결정하고 집행정지 신청을 했다. 법원이 이번에도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이면서 정 회장은 회장직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회장은 지난달 29일 북중미 월드컵 이후 물러나겠다며 사임 의사를 밝혔다.
불붙은 여론
여러 의혹 속에서 홍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월드컵을 맞았고, 조별리그에서 1승 2패로 탈락하면서 논란과 비판 여론에 불을 붙인 상황이다.
특히 이번 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경기는 축구팬들에게 또 다른 악몽으로 남았다. 손흥민을 선발 명단에서 제외하는 파격적인 결정으로 시작한 경기는 전·후반 내내 잘 풀리지 않았다. 한국은 실점 이후에도 수비적인 운영을 고수했고, 많은 해설가와 팬들은 전술적 전략 부재를 패배의 원인으로 꼽았다.
최동호 스포츠 평론가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감독이 "손흥민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라며 손흥민을 원톱으로 내보냈으나 공을 주고받을 선수가 없어 거의 고립된 상태에 가까웠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홍 감독은 전술이나 패턴을 바꾸는 대신 선수를 교체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손흥민 역시 지난 30일 인스타그램을 통해 실망한 팬들에게 사과했다. 그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글을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저보다 훨씬 더 큰 실망과 상처를 안고 계실 팬분들을 생각하면 제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조심스럽지만, 팬분들이 느끼시는 마음도 제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손흥민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스타지만, 홍 감독은 종종 그에 대해 냉담한 모습을 보여 팬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2012 런던 올림픽 대표팀 명단에서 손흥민을 제외했고, 2026 월드컵을 앞두고는 주장 교체 가능성을 시사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축구팬 이동우(40) 씨는 "이번 월드컵에 대한 한국인들의 분노는 단순히 32강 탈락, 홍명보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난 카타르 월드컵 이후 벌어진 총체적인 축구계 난맥상이 그대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분노"라며 "결과마저 내지 못하면서 축구팬들은 축구계에 대한 인내가 끊어져 버린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많은 국민은 한국 축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축구협회의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대통령은 지난 28일 X(옛 트위터)에 "국민들을 허탈하게 한 이번 월드컵 본선진출 실패는 조직과 인사의 실패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라며 "다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체육행정 개혁을 신속하게 추진하겠다"라고 밝혔다.
문체부는 축협에 대한 특별감사를 예고했고, 서울경찰청은 지난 2년간 지지부진하던 축협 관련 고소·고발 사건을 직접 수사하기로 했다.
또 다른 축구팬 김모 씨(36)는 "사람을 고르고 뽑는 절차에서 공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들 편한 식의 감독 선임으로 (월드컵을) 시작했다"라며 "절차를 무시한 결과는 공정한 실패만도 못하다"라고 지적했다.
"그 어느 것보다 '공정'을 기반으로 진행되어야 가치가 있는 스포츠에서조차 '공정'을 무시하고 "결과가 좋으면 아무 말 못 할 걸"이라는 구시대적 논리에 묻혀버린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