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 손으로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어요"... 러시아 수의학계의 위기
러시아산 백신을 맞은 개 수십 마리가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에서 수의약품 선택지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러시아 야로슬라블 지역의 견주들은 반려견에게 정기 예방접종을 하면 러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개 질병으로부터 반려견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접종 후 며칠 만에 일부 반려견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견주들은 고열과 경련, 구토, 출혈 등의 증상이 나타났다고 전했다. 결국 많은 반려견이 숨졌다.
한 견주는 "이 백신 때문에 사랑하는 아이를 잃었다"고 말했다.
"고통이 너무나 컸습니다. 죄책감도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우리는 우리 손으로 아이들을 죽음으로 데려간 셈입니다."
또 다른 견주는 반려견이 "주사를 맞은 부위인 발을 물어뜯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텔레그램에 "상태가 급격히 악화돼 가까스로 동물병원에 데려갔다"고 썼다.
이어 "수의사는 살릴 수 없다고 했고 결국 안락사시켜야 했다"며 "하지만 그 끔찍한 모습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아이가 울부짖던 소리와 고통이 계속 떠오른다"고 말했다.
고의적인 방해 공작?
한편 러시아 소셜미디어 VK에는 또 다른 피해견의 견주가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강아지들을 찾습니다! 치료 방법을 공유해 주세요. 제 반려견은 지금 입원해 정맥주사를 맞고 있습니다."
견주와 수의사들은 잇따른 피해 사례가 러시아산 종합백신 '멀티칸-8'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백신은 광견병과 개 홍역, 그 밖의 여러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제품이다. 대부분의 피해 사례는 같은 제조번호의 백신을 맞은 동물들에게서 발생했다. 해당 제품은 지난 8월 야로슬라블 지역에서 약 100마리의 동물에게 접종됐다.
사망한 동물의 정확한 숫자는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백신과 발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사실도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모스크바와 칼리닌그라드, 사라토프, 튜멘 등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일부 보고됐다.
제조사인 베트비오힘은 처음에는 견주들이 문제를 제기한 제조번호의 백신을 회수했다. 이후 추가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자사의 '멀티칸-6'과 '멀티칸-8' 백신 가운데 추가로 3개 제조번호 제품도 사용하지 말라고 수의사들에게 권고했다.
회사 측은 백신 접종 직후 동물들이 아팠다는 사실만으로 자사 제품이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번 사태가 "적대적인 제3자에 의한 조직적인 고의적 방해 행위" 때문일 가능성도 제기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공개하지 않았다.
러시아 수의약품 규제기관인 연방수의식물위생감독국은 해당 백신에 대한 조사에 검찰이 참여하도록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반려견 주인들의 우려는 특정 백신이나 특정 제조번호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번 사망 사례는 지난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이후 러시아 수의학계가 직면한 더 큰 위기를 드러냈다.
침공 이전에는 러시아의 많은 견주와 민간 동물병원이 노비박과 유리칸, 바이오칸 등 유명 수입 백신에 의존했다. 그러나 서방 제조업체들이 러시아에서 철수하거나 사업 규모를 줄이면서 수입 물량이 크게 줄거나 아예 끊겼다.
수의약품이 서방의 제재로 일괄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사람용 백신과 의약품 공급에는 명시적인 인도적 예외도 적용됐다. 하지만 제재와 러시아의 국제적 고립 심화로 결제와 물류, 사업 운영에 어려움이 커졌고 일부 외국 업체는 자체적으로 러시아 시장에 더 이상 제품을 공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러시아 정부도 여기에 또 다른 규제를 더했다. 2023년 9월부터 외국 수의약품 제조업체는 러시아 당국이 승인한 우수의약품 제조관리기준(GMP) 적합성 인증을 받아야 했다. 이 인증을 받지 않은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더 이상 러시아에 합법적으로 공급할 수 없게 됐다.
이 같은 요인들이 겹치면서 러시아에서 익숙했던 백신과 의약품 상당수가 자취를 감췄고 러시아산 대체 제품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졌다.
러시아 당국은 국내 생산이 충분히 늘어나 수입품을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이며 전반적인 의약품 부족도 없다고 주장한다. 로셀호즈나드조르는 현재 러시아의 여러 업체가 개와 고양이에게 흔히 발생하는 감염병에 대한 백신을 생산하고 있다고 밝혔다.
수의사와 견주들이 전하는 상황은 이보다 복잡하다. 러시아산 대체 백신도 일부 있지만 기존 백신과 정확히 같은 범위의 질병을 예방하지 못할 수 있다. 수입 백신을 중개업자를 통해 구하거나 개인적으로 러시아에 들여오는 방법도 있지만 가격이 비싸고 안정적으로 구하기도 어렵다.
백신은 운송 과정에서도 적정한 저온 상태가 유지되어야 한다. 비공식적인 경로로 유통되는 제품은 가짜일 가능성이 있고 또 적정 온도가 유지되지 않아 품질이 손상됐을 수도 있다.
결국 반려동물 주인들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 러시아에서 합법적으로 구할 수 있는 제한된 종류의 백신을 사용하거나 비싸고 품질을 장담하기 어려운 수입 백신을 구하거나 아니면 반려동물을 심각한 질병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수밖에 없다.
수의사들은 이번 멀티칸 의심 사례를 백신 접종 자체가 위험하다는 근거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특히 광견병은 치명적인 질병이며 사람에게도 전염될 수 있다.
하지만 반려견을 잃은 견주들에게는 안전한 예방접종에 대한 신뢰가 이미 무너졌다. 회수된 백신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백신이 실제 사망 원인이었는지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더 큰 의문은 남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의 반려동물 주인들은 과연 어디에서 안전한 대안을 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