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업계 종사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유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많은 재계 인사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그런데 미국 대선에서 그가 백악관으로 복귀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그에 대한 테크 산업 리더들의 지지가 올라가고 있다.
세계적인 부호 일론 머스크는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밝히고 기부금 모금 활동에 참여해 주목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다. 과거엔 민주당에 기부금을 냈던 앨리슨 후인은 비롯해 투자자 마크 안드레센과 벤 호로위츠, 암호화폐 업계의 거물 윙클보스 쌍둥이 형제 등 거물급 벤처 투자자들과 테크 업계 리더들이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밝히고 있다.
물론 이런 흐름을 보편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2021년 미 의사당 폭동 이후 기업들이 앞다투어 트럼프와 거리를 두던 몇 년 전과는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
특히 실리콘밸리에서 변화가 두드러진다. 실리콘밸리는 공화당이 주장했던 동성 결혼 금지를 지지했다가 기업 임원이 회사를 떠나기도 했던 곳이다.
자산 관리 회사 ‘포투나 인베스터스’의 니콜라스 롱고(27세)는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암호화폐 관련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4년 전에는 트럼프를 지지하면 부정적 낙인이 찍히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롱고는 “2020년이었다면 내가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밝히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변화의 바람은 머스크와 투자자 데이비드 삭스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자주 올리는 소셜미디어에서 두드러진다.
트럼프 진영을 위해 지갑을 열기로 한 이들의 결정은 전통적인 트럼프 지지층을 넘어 크게 확산할 전망이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선거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실제로 테크 업계 리더들의 지지에 힘입어, 트럼프 진영은 몇 달 전 상대 진영과의 후원금 격차를 좁힐 수 있었다.
정치 자금 데이터를 추적하는 비영리단체 ‘오픈시크릿’의 리서치 감독인 사라 브라이너는 “4월 말만 하더라도 트럼프가 상당히 뒤처져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 8주 새 선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성공이 성공을 낳습니다.”
오픈시크릿 데이터에 따르면, 최근 선거에서 벤처 투자자들이 기부하는 정당 비중은 민주당이 높았다. 그리고 최근 바이든 대통령의 불출마 결정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이목이 쏠리는 상황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새 지지자들은 여전히 트럼프에게 헌신적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머스크는 트럼프 진영에 매달 4500만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머스크는 트럼프 선거운동 본부의 기부금 모금에 참여한 것은 일부 인정하면서도, 정확한 기부 액수는 밝히지 않았다.
“난 개인의 자유와 능력을 극대화하는 미국을 믿는다. 한때 그건 민주당이었지만 이젠 공화당으로 옮겨갔다.” 바이든 대통령이 후보직을 사퇴한 후 머스크가 자신이 소유한 소셜 미디어 플랫폼인 X(과거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분석가들은 테크 업계 주요 인사들의 트럼프 지지는 그의 호소력이 확대되고 있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베테랑 공화당 컨설턴트인 살 루소는 “트럼프는 공화당원들에게 자신이 그들이 말하는 것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을 줬고, 그 확신은 이제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산타클라라 카운티(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만에 있는 카운티)에서 승리할 것 같냐고요? 더 많은 성과를 얻을 겁니다.”
트럼프 편에 서다: 일론 머스크
테크 업계 리더들은 바이든 행정부의 암호화폐 규제와 AI에 대한 신중한 접근 등을 우려해 왔다. 기업들은 AI 안전 표준을 준수하라는 바이든 행정부의 최근 행정 명령 등을 부정적으로 평가해 온 것이다.
스타트업 투자, 암호화폐와 인공지능 분야의 큰손인 안드레센과 호로위츠는 최근 기고문에서 “그릇된 정책이 리틀테크(빅테크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막 발걸음을 뗀 테크 스타트업)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제 우리가 일어설 때가 왔습니다.”
그동안 정치 기부금을 꺼렸던 머스크가 이번에 그가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밝힌 것을 두고 주변에서는 놀랍다는 반응이다.
그는 과거 버락 오바마와 악수를 하려고 6시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린 적도 있다고 했고, 2018년에는 자신을 정치적 중도라고 표현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2017년 기후 변화 정책 문제로 트럼프와 결별하면서 ‘백악관 비즈니스 카운실’을 탈퇴한 이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트럼프 역시 테슬라의 전기차를 비싸고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거듭 비판해 왔다.
하지만 머스크는 오랫동안 금융 당국의 규제에 대해 불만을 제기해 왔다.
게다가 2년 전 백악관에서 열린 비즈니스 미팅에 초대를 받지 못했다. 그는 이를 두고 CNBC에 부당한 “무시를 당했다”는 느낌이라고 말했고, 이후 바이든에 대한 그의 비판은 거세졌다.
소셜 미디어에서 머스크는 코로나19 봉쇄와 우크라이나 전쟁, 중국 정책, 트랜스젠더 문제 등 다양한 논쟁에 호전적으로 참전해 온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그가 운영하는 스페이스X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정부 사업을 수행한다. 그 때문에 그가 당선 가능성이 있는 트럼프와의 관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리콘 밸리의 이기주의
민주당은 바이든 행정부가 백만장자와 미실현 자본 이득에 대한 새로운 세금을 제안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테크 업계의 정치적 지지가 달라진 것은 이기심의 발로라고 평가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노동 조직을 포용했고, 반독점 및 기타 사안 관련해 테크 기업을 추적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일부 테크 업계 리더가 등을 돌리게 됐다는 것이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업가 마크 큐반은 트럼프의 약진 이유로 “비트코인 플레이”를 꼽았다. 비트코인 플레이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암호화폐 가치가 오를 수 있다는 전망으로, 민주당은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이런 현상이 초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파로 이동
테크 창업가들의 정치적 견해를 연구해온 스탠포드 경영대학원 교수 닐 말호트라는 “트위터에서 목소리가 큰 사람들”을 업계 전체, 또는 역사적으로 양쪽 모두에 걸쳐 있는 엘리트들와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의 연구팀이 2017년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테크 업계 리더들은 동성 결혼과 낙태, 심지어 세금과 같은 이슈에 대해서도 민주당에 더 많이 동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규제에 대해서는 공화당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말호트라 교수는 이 연구 이후 치안과 학교 교육, 트랜스젠더 권리 등 새로운 사회적 의제가 부상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가 이러한 논쟁의 주 격전지중 하나였고, 일부 테크 업계 리더들이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말했다.
“벤처 투자자 대부분은 여전히 중도 좌파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화당 쪽으로 이동하는 움직임도 분명히 있죠.”
테크 업계에 대한 트럼프의 변화
에반 스와르츠트라우버 ‘미국 혁신 재단’ 고문은 “테크 업계 리더들은 트럼프가 암호화폐와 AI에 대해 보다 방임적 태도를 취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도박에 아무런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 대통령 재임 당시 트럼프는 세금 감면과 반노동 성향의 관료들에게 노동권 행정을 맡겼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탈 규제 형태의 정책을 펴서 산업계의 환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틱톡을 금지하며 중국과 무역 전쟁을 시작했고, 테크 기업을 상대로 반독점 소송을 이끌었다. 어떤 면에선 이전 행정부보다 훨씬 더 개입주의적인 자세를 취한 것이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 공화당을 기존 기조를 밀어붙이면서도 틱톡 금지 및 암호화폐와 같은 사안에 대해선 보다 완화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자유주의 성향 ‘카토 연구소’의 기술 정책 선임 연구원 제니퍼 허들스턴은 트럼프가 현재 소셜 미디어 플랫폼의 소유주라는 점을 지적하며 일부 테크 관련 사안에 대한 입장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부통령으로 거론한 JD 밴스 역시 벤처캐피털 출신으로, 2022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페이팔 창업자 피터 틸의 지원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허들스턴은 “막상 새 행정부가 출범하고 나면 빅테크와 “리틀테크의 이해관계를 구분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라 경고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인 데이비드 브록먼은 트럼프가 낙태와 같은 사회 문제에 대해 당내 다른 인사들보다 온건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산업계에도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낙태 권리를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보수 세력이 뒤집은 것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라 추켜세웠다. 하지만 그는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전국적 낙태 금지 시행에 대해선 반대하며, 이 문제는 각 주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브록먼 교수는 트럼프가 2016년에도 선거운동 때는 비교적 온건했다가 취임 후 극단적인 정책을 펼쳤다고 말했다.
그는 이에 따라 트럼프의 대중적 지지가 내려갔고 공화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월 가와의 관계도 악화했다고 했다.
브록먼 교수는 “테크 및 다른 산업 분야 리더들이 트럼프의 기발한 정책 아이디어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지만…. 아직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트럼프는 테크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몇 가지 급진적인 변화를 지지해 왔다. 서류 미비 이민자 대량 추방과 정부 인력 대폭 감축, 미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상품에 대한 10% 관세 부과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 혁신 재단의 공동 설립자인 개럿 존슨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테크 및 산업계 엘리트들이 트럼프의 견해에 동조해 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중국이 우리나라에 가하는 위협을 홀로 국가적 화두로 끌어올린 사람이 트럼프입니다. 그가 옳았고, 다른 모든 이들이 따라가야 했던 거죠.”
존슨은 “그래서 산업계 리더들이 트럼프에 동조해 가는 것도 역동적인 변화의 일부인 것 같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모든 면에서 옳았냐고요? 아니요, 하지만 여러 가지 큰 사안에서 트럼프는 옳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