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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상황 면했다'...한미 관세협상 1차 성적표는?

1일 전
태극기 배경으로 서 있는 트럼프 인형의 그늘진 옆모습
REUTERS/Dado Ruvic/Illustration

한미 관세협상 결과를 두고 한국에서는 '선방했다'라는 반응이 나오고 있지만, 제조·수출 기반인 한국 경제가 중장기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0일(한국시간 31일)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 "미국은 한국과 전면적이고 완전한 무역협정을 체결하기로 했다"라고 소식을 알렸다.

이번 합의를 통해 한국의 상호 관세와 자동차 및 관련 부품에 적용되던 품목 관세가 25%에서 15%로 조정됐다.

BBC 코리아가 통상 전문가들의 의견을 토대로 합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15% 선' 지켰다

한미 관세협상의 성패를 두고 '15%'라는 숫자가 자주 언급됐다.

지난 22일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과 무역협상을 끝내며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767조원)를 투자하고, 미국이 일본의 상호 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춘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일본 측의 발표에 따르면 상호 관세율뿐만 아니라 자동차 및 관련 부품에 적용되던 25% 품목 관세도 15%로 조정됐다.

한국과 일본은 비슷한 산업 구조로 인해 미국을 포함한 세계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이 일본보다 높은 관세율을 부과받는다는 건 일본 제품에 비해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발표된 미일 간 관세 협상 결과가 일종의 기준점이 됐다. 뒤이어 유럽연합(EU)까지 상호 관세와 자동차 품목 관세를 15%로 조정하면서 한국 정부가 느끼는 부담감은 더 커졌을 것으로 보인다.

외교통상부(현 외교부)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기획단장을 맡았던 이혜민 한국외대 객원교수는 BBC에 "아직 협상 결과가 다 나오지 않았지만, 현재까지 나온 결과로만 봤을 때 EU와 일본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협상을) 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선방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남영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국제학과 교수도 "우리 협상단이 나름 선방했다"라고 판단했다. 남 교수는 과거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교섭관과 대통령비서실 경제보좌관으로 일했다.

그는 "우리 경쟁국인 일본과 EU의 관세 협상이 먼저 타결되고, 8월 1일 관세 부과 시한을 앞둔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목표로 했던 상호 관세와 자동차 15%라는 관세율 합의를 끌어 낸 것은 최악의 상황을 피해 선방한 것"이라고 봤다.

한미 관세 및 무역 협상 주요 내용
BBC

다만 자동차 관세의 경우 한국은 일본이나 EU와 달리 미국과 FTA를 체결한 국가임에도 결과적으로 같은 관세를 적용받아 사실상 손해를 본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은 원래 미국과의 거래에서 자동차 관세 0%를 적용받다가 품목 관세 15%를 부담하게 된 것이지만, 일본과 EU는 기존 관세 2.5%에 트럼프발 품목 관세 12.5%를 더한 15%를 적용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이 누리던 2.5%포인트 만큼의 가격 경쟁력이 사라지는 셈이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이날 관세 협상 관련 브리핑에서 한국 측 협상단이 자동차 관세 12.5%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남 교수는 "이번 관세 합의를 계기로 한미 FTA 체제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됐다"라고 꼬집었다.

자동차에 쏠린 눈

이미 적용되고 있던 자동차 관세가 25%에서 15%로 조정되면서 관련 업계는 한숨을 돌리는 분위기다.

자동차는 한국의 주력 대미 수출 품목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 자동차 수출액 708억달러 중에서 대미 수출액(347억달러) 비중은 49%를 넘었다.

앞서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자동차는 전후방 기업이 매우 많다. 부품이 몇만 개씩 들어가기 때문"이라며 "대미 수출 품목 수출 금액도 제일 많기 때문에, 자동차 관련한 관세 인하가 매우 절실한 그런 상황"이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증권가에서는 자동차 관세가 15%로 조정되더라도 매출 타격이 불가피하지만, 신차 구매 고객을 대상으로 제공되던 할인, 캐시백 등 인센티브를 줄여 상쇄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내에 공장을 갖고 있는 완성차 업체들이 회원사로 있는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는 이날 입장문을 통해 "지난 4월부터 적용돼 온 25% 고율의 자동차 관세가 일본, EU 등 경쟁국가와 동등한 15%로 감소된 것에 대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라며 "협상 결과를 이끌어 낸 정부의 전방위적 통상외교 노력에 대해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협회는 "미국 시장은 우리나라 수출 278만 대 중 50% 이상 차지하는 주력 시장으로, 이번 관세 협상 타결로 우리나라가 일본, EU와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라며 "자동차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이 없어진데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전했다.

쌀과 소고기

쌀과 소고기 시장 추가 개방은 합의 내용에 포함되지 않았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식량 안보와 우리 농업의 민감성을 감안해 국내 쌀과 쇠고기 시장은 추가 개방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앞서 국내 언론은 미국이 쌀 시장과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개방할 것을 한국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일본이 협상을 통해 쌀 시장을 개방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우려가 더 커졌다. 다만 일본도 매년 무관세로 수입하는 쌀 규모 77만톤 안에서 미국산 쌀 수입량을 늘리기로 한 것으로 알려져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쌀과 소고기는 한국의 식량 주권과 연관돼 민감하게 다뤄지는 품목이다. 농축산업 단체들도 시장을 추가 개방할 경우 대정부 투쟁을 예고한 바 있다.

한국은 미국의 5대 농산물 수입국으로, 지난해 한국의 대미 농축산물 무역적자는 약 80억달러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트루스소셜에 남긴 글에서 "한국은 미국과의 무역에 완전히 문을 열 것이고, 자동차, 트럭, 농산품 등 미국 제품을 수용할 것"이라고 언급했는데, 현재로서는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려운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한미 관세 협상이 이제 큰 틀에서 합의를 이룬 만큼 세부 협상이 남아있다며 여전히 불확실성이 남아있다고 판단했다.

이 교수는 "(이번 협상이) 첫 번째 단계고, 그다음에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문서화할 때 내용이 어떻게 될지 봐야 한다"라며 "그다음에는 또 이행 문제가 있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지난 5월 미국과 영국과의 합의 시 '구속력이 없는 합의(non-binding agreement)'라고 했고, 한국 등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분쟁 해결 절차가 없다는 얘기고, 결국 합의문을 미국이 해석한다는 얘기거든요. 그렇게 되면 나중에 합의 내용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해석상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죠."

한 시민이 경남 거제시 아주동 주거단지 너머로 한화오션 거제사업장 대형 크레인을 바라보고 있다
NEWS1
이번 협상에서 마스가(MASGA)라고 부르는 조선 협력 프로젝트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선업, 협상카드 역할 했나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나름대로 성공적인 합의에 이를 수 있었을까.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미 조선 협력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무역 협상 합의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한국은 대미 투자액 3500억달러(약 488조원) 중 1500억달러(210조원)를 조선 협력 전용 펀드로 조성한다. 미국 내 신규 조선소 건립, 조선 인력 양성, 조선 관련 공급망 재구축, 그리고 유지보수(MRO) 등을 포괄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 조선업의 부흥을 돕는다는 것이다.

남 교수도 "미국의 제조업 부흥, 그중에서도 중국 해양 패권의 견제라는 명분을 가진 조선업 분야에서, 'MASGA'로 명명한 조선업 협력 펀드 카드를 제시한 것이 유효한 협상 레버리지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영국 조선·해운 시황 분석기관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선박 수주 점유율 기준 한국과 일본은 중국에 이어 2, 3위를 차지했다.

반면 미국은 1980년대 이후 조선업이 경쟁력을 잃고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현재로선 유의미한 선박 수주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부 산하 통상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미국이 군수 물자 등을 중심으로 중국 의존도를 줄여 나간다고 했을 때, 선박 건조에 관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도움 없이는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라며 "한국과 미국이 조선업 동맹을 통해서 미국 내 제조업에 활기를 불어넣고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은 한미 간에 있어서 굉장한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라고 봤다.

기업이 떠난 자리

앞으로 한국 기업이 관세를 우회하기 위해 미국 현지 투자 비중을 높일 경우 중장기적으로는 국내 제조업 생태계가 빠르게 붕괴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허 교수는 "앞으로 상당히 걱정이 되는 점은 미국에서 생산되는 제품들하고 한국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이 미국 시장에서 격돌하는 상황"이라며 "그렇게 되면 결국 '관세 우회(tariff jumping)'이라고도 하는 전략, 즉 미국의 관세 장벽을 피해서 미국에 공장을 짓고 '메이드 인 USA'로 미국 시장을 겨냥하는 전략들이 나오게 된다"고 지적했다.

"기업들은 살려고 아마 현지화 전략을 펼치겠지만 정부는 그 기업들이 떠난 국민 경제적 피해를 어떤 식으로 앞으로 잘 꾸려 나갈 것인가 그런 데에 대해서 이제 산업 정책을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죠."

이미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LG화학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이 미국 현지에 수조 원 규모 투자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남 교수도 "미국의 관세 인상에 더해서 3500억달러 대미 투자 약속은 한국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제조업 공동화, 지역경제 소멸, 일자리 창출 감소 등의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라며 "이에 대해 새로운 통상 환경 하에서 향후 중장기적으로 한국 제조업 생태계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전략이 필요한 때"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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