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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섬에서 운영되던 중국 사기 조직의 실체

2024.08.24
리앙 링페이
BBC

BBC 조사 결과, 맨 섬의 한 해변 호텔과 전 은행 건물이 중국의 피해자들로부터 수백만달러를 가로채는 데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맨 섬 더글러스에 있는 시뷰 호텔의 식당과 라운지에는 초고속 광대역에 연결된 컴퓨터와 함께 중국인 직원 수십 명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해당 호텔 주방에는 웍(큰 냄비) 전용 요리판도 배송됐다.

중국 법원 문서에 따르면 해당 사기 범죄는 2022년 1월~2023년 1월 사이 발생했으며, 흔히 '돼지 도살' 투자 사기로 알려진 방식이었다. 사기 성공에 필수적인 피해자의 신뢰를 얻는 과정을 ‘돼지를 살찌우는 과정’에 비유하기 때문이다.

BBC는 거의 1년간 자체적인 정부가 있는 이 영국 왕실령 섬에서 어떻게 이 같은 투자 사 기범죄가 이뤄졌는지 확인했다.

또한 이 범죄 기업의 리더가 아일랜드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최첨단 오피스 단지를 건설하겠다며 품은 야망 등 다른 세부 사항도 밝혀냈다.

아울러 법원 서류도 입수했을 뿐만 아니라 유출된 문서에 접근할 수도 있었으며, 회사 내부자들과도 이야기할 수 있었다.

맨섬 더글러스 소재 붉은색과 흰색으로 된 시뷰 호텔 외관
BBC
이 중국 사기 범죄자들은 처음엔 맨섬 더글러스 소재 시뷰 호텔에 사무실을 차렸다

이 회사의 전직 직원이었던 조던(가명)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맨 섬에 왔을 때만 해도 자신이 얼마나 어두운 세계에 들어온 것인지 알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그저 안정적인 행정직 일자리를 얻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던은 이내 자신의 새 고용주가 꽤 비밀스러워 보인다는 걸 눈치챘다. 예를 들어 조던과 동료들은 회사 사교 행사에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조던은 자신의 중국인 동료 중 상당수가 실제 사기꾼들임을 깨닫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2021년 말, 약1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중국 법원 문서에서 ‘MIC’라고 지칭하는 기업에서 일하고자 맨 섬으로 건너갔다. 과거 필리핀 소재 다른 사기 업체에서 일했던 이들이었다.

BBC는 ‘MIC’가 ‘맨스 인터넷 커머스(Manx Internet Commerce)’의 약자임을 밝혀냈다.

MIC는 모두 소유주가 같은 맨 섬 내 기업 그룹의 일부였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킹 겜블링 Ltd’가 운영하는 온라인 카지노였다. 중국 본토에서 도박은 불법이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설립한 덕에 이 그룹의 창업자들은 중국인 고객들을 대상으로 장사할 수 있었으며, 맨 섬의 낮은 도박세율도 누릴 수 있었다.

하워드 피어슨 하우스
BBC
이후 이 중국 사기 범죄자들은 과거 은행이었던 건물로 이사했다

더글러스의 시뷰 호텔에서 근무한 지 몇 달 후, MIC 직원들은 동쪽에 자리한 옛 은행 사무실로 이사했다.

그리고 조던은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보통 4인조로 일하던 새 동료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가끔 들었다고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한 5000마일은 떨어진 곳에 사는 피해자들에게 사기를 치는 데 성공해 자축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더글러스의 MIC에서 일했던 이들 중 6명이 중국으로 귀국한 뒤 중국인을 상대로 투자 사기를 벌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현재 유죄 판결을 받았다.

지난해 말 심리가 진행된 해당 사건은 불법 자금 흐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중국 법원 서류에 따르면 피고인들은 맨 섬과 필리핀의 본부에 있는 공범들과 함께 피해자들을 꾀어냈다.

피고인들은 팀을 이루어 중국인 투자자들을 ‘QQ’(‘왓츠앱’과 유사한 중국 내 인스턴트 메신저)의 단체 대화방으로 끌어들였다고 한다. 1명이 투자 ‘선생’ 역할을 맡고, 다른 이들은 다른 투자자인 것처럼 가장했다.

BBC는 이 법원 문서 등 필리핀에서 더글러스로 건너온 사람 중 상당수가 해당 사기 범죄에 가담했다는 증거를 확인했다. 이들 모두 같은 컴퓨터 장비를 사용했으며, QQ를 통해 사기를 벌였고, 몇몇 관리자를 제외하면 직책도 모두 같았다.

중국 법원 문서에 따르면 투자자로 위장한 이들은 ‘선생’의 돈 버는 기술에 대해 흥분하고 기대하는 분위기를 조장하는 역할을 했다. 이후 피해자에게 특정 투자 플랫폼에 입금해 투자하라고 부추겼다.

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린 피해자는 이대로 따르게 됐으나, 실제로 이들이 입금한 돈은 이 사기꾼들에 의해 빼돌려졌다. 이 플랫폼도 사실 이들이 통제하고 배후에서 조작할 수 있는 곳이었다.

중국 법원은 피해자들이 입은 전체 피해 규모를 파악하긴 어렵다면서도, 최소 12명의 피해자로부터 3887만위안(약 72억8000만원)을 갈취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법원은 피고인들의 자백, 출입국 및 금융 기록, 채팅 기록 등의 증거를 바탕으로 피고인 6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법원 문서에 따르면 해당 사기는 수익성이 높았을 뿐 아니라, 설득력과 기술을 갖춘 팀들이 전선에 나서 ‘돼지 도살’ 수법을 구사하는 등 그 수법도 정교했다고 한다.

중국 법원 문서
BBC
‘(피고인은) … 먼저 … 필리핀으로 간 다음, 맨 섬 더글러스 소재 ‘MIC’ 업체로 갔으며, 이곳에서 사기 행각을 벌였다’는 내용의 중국 법원 문서

한편 BBC는 이 업체의 유일한 수익자의 정체도 밝혀냈다. 그의 이름은 여러 행정 서류 속에 겹겹이 숨겨져 있었다.

MIC와 그 계열사들은 모두 ‘빌 모건’ 개인이 설립한 신탁회사의 소유였는데, 입수한 문건에 따르면 그는 ‘리앙 링페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고 한다.

조던에 따르면 직원들은 그를 ‘보스 리앙’이라고 불렀다.

중국 법원 서류를 살펴보면 맨 섬 소재 MIC의 공동 설립자로 리앙 링페이라는 이름이 언급돼 있으며, MIC에 대해서는 “사기 행각을 벌이고자 설립된 상당히 안정적인 범죄 조직”이라 밝히고 있다.

심리에 출석하거나 기소된 이들 중에 리앙은 없다.

중국 법원은 리앙이 필리핀 소재 사기 업체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한 것으로 봤다. BBC는 MIC의 직원 다수가 맨 섬으로 건너오기 전 해당 필리핀 업체에서 일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또한 조사 결과 리앙은 맨 섬에 투자 비자를 발급받았으며, 맨 섬에서 열린 여러 기업 행사에도 참석한 것으로 밝혀졌다. 리앙의 아내 또한 맨 섬 내 공항 근처 발라살라 지역에 자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한편 맨 섬의 이 기업 그룹은 과거 해군 훈련 기지 부지에 화려한 ‘정원 캠퍼스 식’ 본사 건물을 짓겠다며 계획안에 서명하는 등 야심 찬 포부를 세웠다. 이에 참여한 개발사 대변인은 “맨 섬 내 단일 민간 투자로는 최대 규모”라고 설명했다.

건축가들이 제시한 이미지에 따르면 더글러스의 해안가 언덕 위 사무실 건물들이 들어서고, 내부에는 펜트하우스 아파트, 스파, 여러 바와 노래방 라운지 등으로 채워질 예정이었다.

또한 이 계획서에 따르면 이 캠퍼스 건물은 MIC 직원들 및 온라인 도박 등 MIC의 ‘계열사’를 위해 일하는 이들이 사용하게 될 예정이었다.

버려진 부지
BBC
화려한 그룹 본사 건물이 지어질 예정이었던 이곳은 이제 버려졌다

보수적으로 잡아도 전 세계적으로 '돼지 도살' 투자 사기로 벌어들이는 연수익은 600억달러 이상이다.

주로 동남아시아에 집중하는 UN의 조직범죄 전문가인 마수드 카리미푸르는 “서방 국가에 이러한 (돼지 도살) 사기 조직이 설립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카리미푸르는 이러한 사기 범죄를 막으려는 노력은 마치 “두더지 잡기 게임”과 같다고 표현하며, 범죄자들이 법적 허점이 있고, 감시의 눈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한 “관할 지역을 쇼핑하듯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기에 “조직범죄가 이기고 있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한편 합법적이든 그렇지 않든 맨 섬에 대해 이 그룹이 품은 야망은 이제 끝이 난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 현지 경찰이 과거 은행 사무실로 쓰였던 건물을 급습했다. 또한 이른 새벽 사다리를 이용해 1층 창문을 통해 맨 섬의 사법 재판소 옆인 주소지도 급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표된 성명에서 경찰은 이번 압수수색이 ‘킹 겜블링 Ltd’와 관련된 더 광범위한 사기 및 돈세탁 수사와 관련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7명이 체포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고 덧붙였다.

그 이후로 3명이 추가로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맨 섬의 법무장관의 요청에 따라 이달 초 MIC와 ‘킹 겜블링 Ltd’를 포함한 그룹 내 회사들에 대한 법정관리인이 임명됐다.

맨 섬의 도박 규제 당국은 MIC의 도박 라이선스를 박탈했다.

공원식 캠퍼스 본사가 세워질 부지는 이미 나무가 베어지고 공사를 알리는 간판이 세워졌으나, 현재 무기한 보류된 상태다.

BBC는 여러 경로를 통해 관련 회사들과 빌 모건/리앙 페이이 및 이사진과 접촉하려 했으나 아무런 답은 없었다.

또한 시뷰 호텔 측이 호텔 안에서 불법 행위가 벌어지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고 볼만한 부분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시뷰 호텔 또한 마찬가지로 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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