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별장 앞에 나타난 80m 선박, 위성사진으로 추적해보니
북한 원산 앞바다에서 포착된 80m 크기의 대형 (호화) 레저 선박. 선체 중앙에는 50m 길이의 수영장이 눈에 들어온다. 수영장 한쪽 끝에는 여러 개의 미끄럼틀이 설치돼 있다.
위성사진에 따르면 이 선박은 지난해 10월부터 6월까지 약 9개월 가까이 원산의 한 선박 정비 시설에 머물렀다. 선박은 7월 들어 정박장을 떠났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원산 별장 인근 해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BBC가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10월 중순까지 위성 사진을 분석한 결과, 80m 선박을 비롯해 50~60m급 대형 선박 세 척이 김 위원장의 별장이 위치한 원산 일대에서 반복적으로 포착됐다.
북한에서 이 정도 규모의 선박들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까.
BBC는 위성사진을 통해 이 선박들의 여름 활동을 추적하고 전직 북한 당국 관계자를 포함한 탈북민, 그리고 전문가들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이 정도 규모의 선박을 최고지도자와 무관한 개인이 독자적으로 소유하거나 자유롭게 이용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수개월 멈춰 있던 80m 선박, 여름 들어 별장 앞으로
BBC가 추적한 원산 일대의 대형 선박은 길이 약 50m, 55m, 60m, 80m 등 총 네 척이다.
가장 뚜렷한 변화가 나타난 것은 네 척 가운데 가장 큰 80m 선박이었다.
80m 선박에는 약 50m 길이 수영장에 레인 4개가 설치돼 있고, 그 옆에는 여러 개의 미끄럼틀이 있어 위성사진에서도 비교적 쉽게 식별된다.
미국의 상업 위성영상 업체인 '플래닛랩스(Planet Labs)'와 '밴터(Vantor)'가 촬영한 위성사진에 따르면 이 선박은 원산의 선박 정비 시설에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6월까지 정박해 있었다.
하지만 7월, 움직임이 나타났다. 80m 선박은 7월 초 김 위원장의 원산 별장 앞바다 인근 갈마반도에서 포착된 뒤, 흐린 날씨로 인해 식별이 어려운 상황을 제외하면 10월 중순까지 같은 일대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됐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선박들의 움직임도 함께 나타났다.
7월 말부터 8월까지 촬영된 위성사진에서는 50m와 55m 선박 두 척이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주변 섬인 대도와 신도 주변에서 확인됐다.
김정은 일가의 여름나기?
북한 지도부의 외화 조달과 관리를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진 노동당 39호실 산하 기관에서 간부로 근무했던 리정호 코리아번영개발센터 대표는 BBC에 과거에도 대형 선박들이 겨울에는 수리 시설에 정박해 있다가 여름철에는 김 위원장의 별장이나 갈마반도 쪽으로 이동하곤 했다고 전했다. 여름철 휴가를 즐기기 위한 목적이라는 설명이다.
"겨울에는 조선소에 정박시켰다가 여름이 되면 그걸 꺼내서 김정은 별장에 넣든지 갈마(반도) 쪽에 넣든지해서 해수욕을 하곤 했습니다."
원산 별장과 주변 바다가 최고지도자의 여름철 휴양 공간으로 이용됐다는 증언도 있다.
최고지도자의 별장을 경호하는 이른바 '974부대'에서 13년간 근무했던 탈북민 강진 씨는 BBC에 원산 별장에서 근무할 당시 여름이 되면 어린이 수십 명이 모여 수상스키를 타는 모습을 봤다고 말했다.
강 씨는 "5세부터 17세로 보이는 아이들이 수십 명 있었고, 아이들은 여름에는 수상스키를 타고 놀았다"고 회상했다.
위성사진에서는 50m 선박 옆에 소형 보트 네 척이 붙어 있는 모습도 확인됐다.
위성사진 전문가인 정성학 한반도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은 이 소형 보트들은 승·하선이나 물자 혹은 연료 보급, 선박 점검 등을 지원하는 보조선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김정은 전용 레저선들이 대도와 신도 등 섬에 자주 가는 이유는 사람들 눈에 안 띄는 호젓한 곳에서 사생활이 보장되는 해상 휴양지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김 위원장은 7월 28일 정전협정 체결일 73주년 경축행사에 참석해 전쟁노병 및 전시공로자들과 기념사진 촬영을 마지막으로 약 10일간 공개활동이 없었다. 이후 8월 8일, 창립 80주년 기념 국립교향악단과 기념사진 촬영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딸 주애의 공개 활동 공백은 더 길었다. 6월 4일 이후 7월 26일까지 52일 동안 공개석상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 7월 29일부터 8월 6일까지 김 위원장과 부인 리설주, 딸 주애의 공개 활동이 확인되지 않은 것인데, 당시 80m 선박은 7월 26일부터 8월 6일까지 별장 인근에서 반복적으로 포착됐고 50m와 55m 선박도 원산 앞바다의 대도와 신도 주변에서 함께 포착됐다.
선박 위치만으로 김 위원장과 가족의 행적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공개 활동이 없는 시기와 선박의 움직임이 겹친다는 점은 비공개 행적을 추정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누가 이 선박을 이용할 수 있나
북한은 이 선박들의 공식적인 소유관계를 공개한 바 없지만, 선박들은 김정은 위원장과 그 가족이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BBC가 인터뷰한 탈북민들은 북한에서 이 정도 규모의 선박을 최고지도자와 무관한 개인이나 고위 간부가 독자적으로 소유하거나 이용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리정호 대표는 대형 유람선은 일반 주민이나 기관을 위한 것이 아닌 최고지도자가 이용하는 성격의 선박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북한에서 최고지도자 전용 별장은 다른 간부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주변에서 관리되는 대형 유람선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재 국민의힘 미디어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탈북민 김금혁 씨도 북한에서 최고지도자 가족이 사용하는 자산을 다른 고위 간부가 사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상상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김정은이 타고 다니는 전용 벤츠를 김정은이 안 타고 조용원(김정은 위원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이 탄다는 것은 사실 존재할 수 없는 일입니다."
김 씨는 이어 "북한에서 그 정도 규모의 유람선을 소유할 수 있는 개인은 없다"며 최고지도층이 아닌 사람이 유람선을 독자적으로 소유한다면 그 자체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유람선이 반복적으로 포착되는 위치도 중요한 단서다.
원산은 김정일 시대부터 최고지도자와 가족을 위한 별장과 휴양 시설이 자리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김진무 전 숙명여대 교수는 원산이 북한 최고지도자 가족과 밀접하게 연결된 장소라고 설명했다. 그는 원산은 "김정일의 본거지"라며 김정은, 김여정 등 삼 남매가 원산에서 자랐기 때문에 원산에 가족을 위한 별장과 휴양 시설이 집중돼 있다고 덧붙였다.
리 대표는 다만 김정은 위원장 혼자만 선박을 이용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가족 구성원은 물론 김 위원장이 직접 초대한 일부 측근이나 고위 간부 등이 함께 이용할 수 있으며, 김정일 시대에도 최고지도자와 휴가를 함께 보내던 별도의 측근 그룹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김정은 위원장과 대형 레저 선박을 이용했다는 증언도 있다.
2013년 북한을 방문했던 미국프로농구(NBA) 선수 출신 데니스 로드먼은 영국 일간지 '더선'과 인터뷰에서 7일간의 북한 방문 일정 대부분을 김정은의 섬(원산)에서 음주 파티와 제트스키, 승마 등을 즐기며 보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이용한 길이 60m의 선박을 "여객선과 미국 디즈니랜드 유람선을 섞어 놓은 모습"이었다고 묘사했다.
80m 선박의 흔적은 유엔(UN) 대북 제재가 시작되기 전인 20여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BBC가 과거 위성사진을 분석한 결과, 현재 선박과 같은 특징을 지닌 대형 선박이 김정일 집권 시기인 2002년 원산에서도 확인됐다.
이 선박에 대한 과거 증언도 남아 있다.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는 자신의 저서에서 원산에서 길이 50m 수영장과 두 개의 미끄럼틀이 설치된 선박이 있었고, 김정일이 원산을 찾을 때 이 선박의 수영장을 이용했다고도 밝힌 바 있다.
올해 80m 선박은 지난해 11월부터 6월 말까지 정비 시설에서 반복적으로 포착된 뒤, 7월 여름철을 맞아 김 위원장의 별장 인근 앞바다로 이동했다.
2024년에도 80m 선박은 김 위원장의 원산 별장 인근 해상에서 반복적으로 포착된 바 있다.
이런 움직임이 매년 같은 방식으로 반복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80m 대형 호화 선박은 김정일 시대부터 원산에서 확인돼 왔고, 현재도 같은 위치에서 여름에 활동하고 있다는 점은 위성사진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북한 주민들에게 '여름휴가'란
위성사진에 포착된 선박들의 가격은 독립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비슷한 규모의 호화 요트는 수천만 달러에서 1억달러(약 1300억원) 이상에 거래되기도 한다.
2025년 김정은 위원장이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의 방북 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29m 길이의 '프린세스 요트'도 과거 약 94억원(700만달러)으로 추정된 바 있다.
반면 북한 주민 대다수는 휴가는 온전히 누리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사회주의로동법'에 따르면 노동자와 사무원, 협동농장원에게 해마다 14일의 정기휴가를 보장하며 직종에 따라 7~21일의 보충휴가를 주도록 규정돼 있다. 하지만 BBC가 인터뷰한 탈북민들은 이런 규정이 실제 현장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증언했다.
탈북민들에 따르면 일반 주민들이 며칠 연속으로 휴가를 내 여행을 떠나는 일은 드물며, 별도의 '여름휴가'를 떠나는 문화는 생소하다고 설명했다. 주말이나 국가 명절을 이용해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를 가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덧붙였다.
휴가를 받더라도 여행 자체에 제약이 따른다. 북한 주민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시·군을 벗어나 이동하려면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지난 7월 발표한 '2025년 북한 경제성장률 추정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187만3000원으로, 한국(5258만원)과 비교했을 때 약 28분의1(3.6%) 수준이다.
*그래픽: 아르빈 수프리야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