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김윤아가 30년 가까이 음악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
지난 8월 전주의 한 음악 페스티벌 대기실. 공연을 앞둔 김윤아는 거울 앞에 앉아 무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눈가에 파란색 아이섀도를 칠하고 화장을 다듬은 뒤 의상을 갖춰 입는다. 김윤아는 이 과정을 '갑옷'을 입는 것에 비유했다.
"제게 의상이란 갑옷과도 같은 것이지요.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최고의 퍼포먼스를 올리기 전에 준비하는 것입니다."
1997년 자우림의 보컬로 데뷔한 김윤아는 내년이면 데뷔 30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자우림 정규 앨범 12장과 솔로 정규 앨범 5장을 발표했고,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저작물은 300곡이 넘는다.
BBC는 지난 6월 여성 음악가들을 중심으로 열린 '영희 페스티벌'을 계기로 김윤아를 인터뷰했다. 30년 가까이 음악을 이어온 과정, 그리고 자우림과 솔로 김윤아로서의 삶과 음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자우림의 김윤아, 솔로 김윤아
김윤아가 만들어온 음악에는 두 개의 이름이 있다. 하나는 자우림, 다른 하나는 솔로 김윤아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준흠 씨는 김윤아를 "1990년대 이후 한국 모던록을 대표하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여성 아티스트 가운데 가장 높은 음악적 평가를 받는 뮤지션"이라고 평가했다. 자우림과 솔로 활동 모두에서 뚜렷한 음악 세계를 구축해왔다는 설명이다.
두 이름으로 음악을 만들 때 김윤아의 출발점은 서로 다르다. 자우림의 곡을 쓸 때 그는 자신이 아닌 가상의 '청년'이 된다.
"이 사람은 연령도 불확실하고 성별도 불확실한 어떤 사람이에요. 마음속에 폭풍이 가득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사람이고, 질문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답을 얻지 못한 사람이에요."
그는 이 인물을 "저희 멤버 세 명의 교집합을 어떤 화자로 만들어 놓은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어떤 세상을 보고 있을까, 이 사람의 고민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곡을 만든다"고 덧붙였다.
솔로 김윤아의 출발점은 다르다. 그는 "솔로 음악을 만들 때는 다른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며 "저 자신이 되면 된다"고 했다.
"특히 저는 여성인 저 자신이 너무 좋고 여성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여성으로서의 인생을 가득 표현할 수 있는 기회죠. 그래서 굉장히 궁극적인 부분, 출발 지점이 다른 것 같아요."
https://www.youtube.com/watch?v=LrB-fJn-3w4&list=RDLrB-fJn-3w4&start_radio=1
이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세대도 달라졌다.
지난 8월 전주 공연이 끝난 뒤 만난 한 관객은 1997년 데뷔 때부터 자우림의 음악을 들어왔다고 했다. 자우림의 음악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를 묻자 "우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답했다.
한편 이날 공연장에서는 자우림이 데뷔한 뒤 태어난 관객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1999년생인 한 관객은 평소 밴드 음악과 페스티벌을 좋아해 공연장을 찾았다고 했다. 처음부터 자우림의 열성 팬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날 공연에서는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특히 기억에 남았다며 "갑자기 파노라마처럼 즐거웠던 기억들이 지나가면서 괜히 벅차오르더라"고 말했다.
김윤아 역시 요즘 자우림과 자신의 공연에서는 20~30대 여성 관객의 비중이 가장 높고, 부모와 자녀가 함께 공연장을 찾거나 10대 팬들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서로 다른 세대가 자우림의 음악을 듣는 이유를 노래가 다뤄온 이야기에서 찾았다. 그는 "아마 인생에 관한 노래들이 많아서가 아닐까 생각한다"며 "젊을 때의 일시적인 열병 같은 감정이라든지, 지금 유행하는 스타일의 음악이라든지 그런 요소가 거의 없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도 이런 생각 해봤는데', '나도 이랬으면 좋겠다',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지?' 하는 곡들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연령대 분들께 골고루 사랑받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삶을 다룬다'
그중 하나가 2013년 발표된 자우림 9집 타이틀곡 '스물다섯, 스물하나'다. 이후 동명 드라마의 제목으로 쓰이면서 이 노래를 뒤늦게 접한 청자들도 생겼다.
노래가 시작된 것은 어느 봄날 아침이었다. 아이를 유치원 버스에 태워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꽃잎이 바람에 떨어지는 모습을 봤다.
그는 "그 순간이 너무너무 행복하고 그 찰나가 너무 아름다웠다"고 떠올렸다.
"꽃잎이 바람에 따라서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때 그냥 '바람에 날려 꽃이 지는 계절에' 이게 머리에 꽉 들어왔어요. 그 부분까지 다 생각이 나서 '집까지 빨리 가서 이걸 메모해야 돼' 하고 뛰어가서 만든 곡이에요. 정말 그 아름다운 찰나, 너무 소중했던 그 순간이 그냥 그 자체로 연결돼 만들어진 곡입니다."
어떤 노래는 이처럼 일상의 한순간에서 시작되지만, 어떤 곡은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을 거친다.
김윤아는 "굳이 따지자면 그래도 편안하게 노래를 작업하는 편"이라면서도 "주로 내면으로 많이 침잠해 들어가야 되는 곡들을 작업할 때는 저를 갉아먹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표현이 적합할지 모르겠는데, 골수가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고 덧붙였다.
영감의 범위는 자신의 경험에만 머물지 않는다. 자우림의 가장 최근 정규 앨범인 12집 'LIFE!'의 타이틀곡 중 하나인 'LIFE!'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함께 들여다보며 만든 곡이다.
김윤아는 특히 텍스트 중심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제가 거기에 글을 올리고 사진을 올리는 게 즐거운 게 아니라, 그 창을 통해서 많은 분들의 인생을 바라보는 게 너무 즐겁다"며 "그게 많은 공부가 되고 영감의 원천이 된다"고 말했다.
'LIFE!'는 그렇게 "여러분들의 인생과 제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만든 곡"이라고 했다.
김윤아는 살아가며 겪는 경험들이 자신을 바꾸고, 그 변화가 다시 음악에 반영된다고 했다. 그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며 "그 경험들을 통해서 저 자신이 바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음악은 놓지 말아라'
아이를 낳고 키운 경험도 김윤아를 바꿔 놓았다.
"아이와 함께한 시간들이 만약에 아이가 없었으면 몰랐을 세상을 알려주었고, 못했을 경험을 하게 해주었고, 그래서 그게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그는 "굳이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제 시각은 이미 아이가 있는 엄마의 시각"이라며 "음악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다만 이전처럼 일을 이어가는 데는 훨씬 많은 에너지가 들었다. 김윤아는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다"고 돌아봤다.
"인생의 에너지를 10을 쓰면서 살았다면 아이가 생기고 내 인생을 똑같이 살기 위해서는 거의 25의 에너지가 필요한 것 같아요. 일도 해야 되고 아이도 키워야 되니까 체력적으로 진짜 갈아 넣으면서 살았죠."
자우림이 데뷔 10주년을 맞아 안식년을 계획하던 무렵 아이를 가진 김윤아는 임신 7개월까지 무대에 섰다. 출산 뒤에는 작업실을 집 안으로 옮겨 곡 작업을 이어갔다. 잠잘 시간은 늘 부족했다.
그는 "어떤 요령이 있어서 대처한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살 수밖에 없으니까 못 자고 살았다"고 회상했다.
김윤아는 데뷔 당시와 비교하면 여성 싱어송라이터는 크게 늘었지만, 오래 활동하는 여성 동료들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의 사례가 되고 싶다고 했다.
"많은 여성 뮤지션 동료분들께 '저 사람도 저렇게 음악을 오래 하고 있는데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항상 생각했거든요."
인터뷰 후반 그는 "누구나 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무엇이든 존중받아야 할 본인의 선택의 문제라고 했다.
다만 음악을 계속할지를 고민하는 동료나 후배에게는 "먹고살 궁리를 먼저 하고, 그러나 음악은 놓지 말아라"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30년 가까이 음악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를 묻자, 김윤아는 특별한 비결보다 계속 활동하는 것 자체를 꼽았다
이제는 쉬엄쉬엄 해도 되지 않느냐는 말도 듣지만, 그는 "직장 생활을 쉬엄쉬엄 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라며 웃었다.
"저는 쉬는 것보다 일하는 게 재미있어요. 음악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대상인데 이게 제 직업이 됐으니까, 음악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너무 재미있고 도파민이 막 펑펑 터지는 그런 작업들이에요."
김윤아는 "꾸준히 하는 게 꾸준히 할 수 있는 비결이 돼 가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좋아한 아일랜드 뮤지션 시네이드 오코너에게서 "자기 음악에 자기 인생을 담는 게 어떤 건지"를 배웠다고 했다.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오코너와 달리, 그는 음악이 "공명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증폭시키는 역할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에게 이제 중요한 것은 다음에 만들 음악이다. 자우림과 김윤아의 다음 앨범들을 "전작들 이상으로, 제 자신이 만족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늘 목표라고 했다.
"보컬리스트로서 저는 아직 중도에 있다고 생각해요. 과정 중에 있고 조금 더 발전해 나가고 싶어요. 저는 계속 좋은 소리를 찾아가고 싶어요."
추가 보도: 이선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