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치명적 화재 애도 속 입법회 선거 실시
홍콩에서 치명적인 화재로 일부 시민들의 분노가 커진 가운데, 여론을 가늠할 시험대로 여겨지는 입법회 선거가 열렸다.
홍콩 정부는 입법회 의원을 뽑는 이번 선거를 위해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며 시민들의 투표를 독려하고 있다. 출마한 모든 후보는 중국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해 철저한 검증을 거쳤다.
이번 선거는 160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타이포 지역 화재로 많은 이들이 애도에 잠긴 가운데 치러진다.
최근 당국은 생존자들에게 구호를 지원하고, 용의자들을 체포하며, 건물 안전을 강화하려는 조치를 내놨다. 일부 홍콩 시민들이 이번 사건을 둘러싼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법회는 일종의 '미니 의회' 역할을 하며 법안을 제정하고 수정할 수 있다. 이번 선거에는 총 161명의 후보가 90석을 두고 경쟁하고 있다.
이번 선거는 2021년 이후 두 번째로 치러지는 입법회 선거다. 당시 중국은 홍콩 선거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해 '애국자'만이 출마할 수 있도록 했다.
중국 베이징은 이 같은 변화가 2019년 시위 이후 홍콩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비판론자들은 홍콩의 민주주의가 크게 약화됐다고 지적한다.
선거제 개편 직후 치러진 지난 선거에서는 유권자 냉담 속에 역대 최저인 30%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올해 홍콩 정부는 각종 경품과 쇼핑 할인 혜택을 내걸고, 도시 곳곳에 포스터를 붙이며 시민들의 투표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투표를 마치는 모든 유권자에게는 '감사 카드'가 지급된다. 이 카드는 지정된 가게와 식당에서 사용하는 상품권으로 교환할 수 있으며, 미용 서비스, 건강검진, 보험료 납부 등에 사용할 수도 있다.
또한 투표 당일에는 공공 수영장과 박물관 무료 입장을 제공하고, 여러 동네에서 카니발을 열며, TV를 통해 버라이어티 쇼와 갈라 공연도 선보일 예정이다.
정부는 선거를 위해 만화 캐릭터 마스코트와 주제가도 만들었다. 주제가는 2001년 칸토팝 스타 곽부성의 히트곡을 개사한 '투표하자, 함께 미래를 만들자(Let's Vote, Together We Create The Future)'다.
에릭 찬 정무부총리는 지난달 기자들에게 "이러한 조치가 즐겁고 축제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자, 주민들에게 선거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홍콩 시민들의 관심은 타이포 북부 완푹 코트 고층 주거 단지를 집어삼킨 지난달 26일 화재에 집중되고 있다.
이번 화재는 홍콩에서 지난 70여 년 사이 최악의 참사로 기록됐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는 159명으로, 시신 수습이 이어지면서 사망자 수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홍콩이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이번 화재를 막을 수는 없었는지, 또 건물 안전 기준에 문제가 없었는지 묻고 있다. 홍콩에는 완푹 코트와 유사한 노후 고층 건물에 거주하는 시민이 매우 많은 상태다.
당국은 화재 원인을 조사하기 위한 독립위원회 구성을 명령했고, 과실치사 혐의로 13명을 체포했다.
또한 시 전역의 건물 보수 공사에 사용된 비계 안전망을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조사 결과 완푹 코트 보수 공사에 사용된 비계 그물망은 방염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고, 결국 건물 외벽의 기타 가연성 자재 때문에 화재가 급속도로 확산된 것으로 드러났다.
당국은 반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지난 6일에는 독립적인 조사위원회 구성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에 참여한 한 남성이 선동 혐의로 경찰에 구금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청원은 인터넷에서도 삭제됐다.
전 구의원을 포함한 다른 두 명 역시 경찰의 조사를 받기 위해 연행됐다.
입법회 선거를 위한 공식 선거운동은 화재 직후 전면 중단됐다. 이후 정부 주관 토론회는 며칠 뒤 다시 재개됐지만, 선거 캠페인과 연계된 각종 행사는 모두 취소됐다.
존 리 홍콩 행정장관은 "슬픔을 힘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예정대로 입법회 선거를 치르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새로 구성될 입법회가 재건과 제도 개혁을 신속히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콩대학교 명예교수이자 중국 정치 전문가인 존 번스 교수는 "높은 투표율이 나온다면 정부는 이를 홍콩의 새 정치 체제를 유권자들이 상대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신호로 해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그는 타이포 화재의 여파 등으로 인해 투표율이 낮을 것으로 예상했다.
번스 교수는 홍콩 유권자 다수가 전통적으로 사실상 출마가 막힌 범민주 진영 야권을 지지해 왔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들은 2021년 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투표에 나서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화재 이후 친중·친정부 성향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불러내는 일도 정부 입장에서 쉽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화재로 집을 잃은 이들을 신속하게 재배치하고, 각종 지원을 제공한 당국의 대응은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빠르고 비교적 관대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화재로 드러난 여러 거버넌스 문제에 실망하고, 나아가 분노하며 투표를 기피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번 주 홍콩 국가안전처는 친베이징 성향 매체의 논평을 재공유했다. 이 논평은 시민들에게 정부의 재건 노력을 지지하는 의미에서 투표에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논평은 "함께 좋은 미래를 만들어 가는 일은 이번 한 표에서 시작된다"며 "진정으로 홍콩을 사랑한다면, 적극 투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콩 곳곳은 입법회 선거 포스터로 뒤덮였다.
올해 입법회 선거에서는 현역의 약 4분의 1이 물러나면서, 새로운 얼굴들이 대거 등장할 예정이다.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베이징은 비공식적으로 연령 제한을 두며 일부 의원들에게 불출마를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는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전 보안장관이자 중진 정치인, 레지나 입을 포함해 70세가 넘는 인사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